2021 법무사 2월호
자연에 은둔하며 시를 짓는 맹호연이 겨울이 되면 제일 먼저 피는 매화를 보러 장안( 長安 )의 동쪽으로 흐 르는 파수( 灞水 )에 놓인 파교( 灞橋 )를 건너가는 장면을 화가들이 앞다투어 그렸다. 주로 나귀 등에 탄 채 책을 읽는 맹호연을 그리거나, 시에 몰입하여 움츠린 모습, 폭 설을 맞으며 매화를 찾아 떠나는 모습이 대표적이다. 심사정, 멸문지화집안생계위해화가로전향 심사정은 조선 후기 진경시대의 화단에 남종문인 화를 정착시킨 직업 화가였다. 유행에 얽매이지 않는 강 한 정신만큼이나 그의 인생 또한 드라마틱하다. 심사정은 인조반정의 일등공신 심지원( 沈之源 )의 증손자로 명문가 집안에서 태어났다. 아버지 죽창( 竹窓 ) 심정주( 沈廷冑 , 1673~1750)는 포도 그림을 잘 그렸으며, 집안 대대로 예술에 조예가 깊었다. 유복한 환경에서 자란 심사정은 할아버지 심익창 ( 沈益昌 )이 역모( 逆謀 )에 연루되어 하루아침에 멸문지 화를 당한다. 그의 나이 열여덟 살 때였다. 집안이 쑥대 밭이 되자 심사정은 학문을 하던 붓을 틀어 그림으로 생계를 이어갔다. 역적으로 낙인찍힌 그를 모두 외면했 지만 다행히 당대 유명한 학자, 화가, 감식안, 비평가들이 그의 그림 실력을 알아주었다. 실학자 이덕무( 李德懋 1741~1793)가 쓴 『청장관전 서( 靑莊館全書 )』에는 “반송지 북쪽 골짜기를 따라 올라 가 현재 심사정의 처소를 방문하였다. 초가가 쓸쓸한데, 종산의 단풍나무와 뜰 앞의 국화는 무르익고 아담한 그 경색이 마치 그려 놓은 듯하고, 그가 그린 4폭의 그림은 고상하여 속됨이라고는 조금도 없다”라고 기록해 놓았 다. 열여덟에 멈추어버린 인생은 세상을 등지고 그림에 전념하는 고독한 삶으로 이어졌다. 활달하고분방한필선, 남종문인화의진수 「파교심매도」는 겨울 산의 설경이 시적 정취로 가 득하다. 낮은 언덕에 앙상한 나무가 수려하고 계곡에서 당나라시인맹호연의고사를소재로 화초에 물을 주다가 멈칫했다. 난초에서 꽃대가 얼 굴을 내밀고 있는 것이 아닌가. 꽃대와 눈이 마주치자 웃음이 났다. 이 추위에 꽃대를 피우다니, 자연의 순리 앞에 저절로 숙연해진다. 남쪽에서는 꽃소식도 있다. 엄 동설한에 매화가 피기 시작한 모양이다. 매서운 추위를 견딘 꽃이기에 매화는 사군자 중 으 뜸이다. 혹한 속에서 핀 매화는 희망의 불꽃처럼 붉다. 예로부터 매화는 시인에게 시가 되고, 화가에게 그림이 되었다. 한겨울에 매화를 찾아 떠나는 탐매( 探梅 )는 도 인에게 구도의 길이기도 했다. 현재( 玄齋 ) 심사정( 沈師正 , 1707~1769)의 「파교심 매도( 灞橋尋梅圖 )」는 폭설이 내린 날, 선비가 매화를 찾 으러 파교를 건너기 직전의 광경이다. 고요한 정적 속에 하염없이 눈은 내리고 나귀의 발굽소리가 천지를 흔든 다. 이 그림은 중국 당나라 시인 맹호연( 孟浩然 , 689 ~740)의 고사를 소재로 한 작품이다. 그림과눈을 맞출때 추위 속에서 붉은 매화를 찾아 떠나다 심사정의 「파교심매도( 灞橋尋梅圖 )」 김남희 화가 · 『옛 그림에기대다』 저자 슬기로운문화생활 지금이순간, 바로이그림이야기 8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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