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1 법무사 5월호

어린시절더부살이와가난극복하고한국대표작가로 양달석은 경남 거제시 사등면 성내마을에서 3남1 녀 중 차남으로 태어났다. 아홉 살 때, 한의사인 아버지 를 여의고, 큰아버지 집에서 소를 키우며 더부살이를 한 다. 누이의 도움으로 간신히 열여섯 살 때 통영사립강습 소에서 현대식 교육을 받으며 그림에 소질을 드러낸다. 이후 진주공립농업학교에 진학, 일본 중등학교 미 술전람회에서 ‘특선’을 하며 그림 실력을 인정받는다. 1932년 조선미술전람회 서양화부에서 첫 ‘입선’을 하고, 일본 동경으로 유학을 간다. 제국미술학교에서 서양화 를 수학하다가 생활고로 중퇴한 후 고향으로 돌아온다. 1938년 제17, 18회 조선미술전람회에서 연이어 입 선을 한다. 심사위원으로부터 “무엇인가를 집어삼킬 듯 한 힘을 가진 농부의 농악을 잘 표현했다”는 평을 받는 다. 1940년에 조선미술전람회에 큰 뜻을 품고 출품했지 만 낙선의 고배를 마신다. 그 충격으로 고향을 떠나 부 산으로 이주한다. 이 무렵부터 ‘소와 목동(故鄕)’이 그림 의 주제가 된다. 1960년, 서울에서 가진 두 번째 개인전은 그가 화 가로서 빛을 보는 순간이었다. 이때의 개인전은 한 신 문에 「민요화가 양달석의 반생」이라는 기사를 통해 “머 슴살이에서 비롯된 꿈, 그림에 담아보는 동심의 애수를, 서울서 20여 년 만에 개최하는 개인전”이라고 소개되었 다. 1973년에는 ‘한국미술 60년’, ‘대표작가 100인전’ 의 초대작가가 되었고, 이후 중풍으로 긴 투병생활을 한 다. 미술평론가 이시우(李時雨, 1918∼1995)는 “그의 그 림은 시종일관 인간 본래의 선한 모습과 평화로운 자연 속에 자유롭게 뒹굴며, 인간 존재의 기쁨을 구하고 있 다”고 평했다. 마음의안식처 ‘소’ 잃어버린후화폭에담기시작 작품에 깃든 그만의 소박한 평화주의는 어린 시절 의 결실이다. 큰아버지 집에서 더부살이할 때였다. 하루 는 소를 몰고 산에 갔다가 깜박 조는 사이에 소를 잃어 버린다. 큰아버지에게 야단을 맞고 소를 찾아 헤맨다. 큰 집에서는 소를 잃어버린 것이었지만, 그에게는 마음의 의지처를 잃어버린 아픔이었다. 다행히 다음 날 간신히 소를 찾는다. 그날 이후 소가 그의 화폭에 들어온다. 「소와 목동」은 싱그러운 녹색 풀밭에서 세 명의 사 내아이와 한 명의 여자아이가 소를 중심으로 개구지게 포즈를 취한 그림이다. 우직한 소는 아이들의 든든한 친구다. 웃음소리가 끊이지 않고 눈동자는 해맑기 그지없다. 소의 목에 걸터 앉은 아이, 소 등에 올라탄 아이, 소의 앞발에 기대고 앉 은 아이. 평화롭고도 환상적인 광경이다. 녹색의 풀밭이 차분히 마음을 가라앉게 한다. 아이들의 표정과 눈빛은 밝고 천진하다. 소와함께평화로운아이들, 몽환적으로표현 화면에 녹색계열의 풀이 융단처럼 깔렸다. 사뭇 몽 환적이다. 몽글몽글한 초록의 풀이 안정감을 준다. 멀리 우거진 숲을 두어 녹색 동산이 하늘에 둥실 떠 있는 것 같다. 소의 앞발에 의지한 아이는 흰색 저고리에 백록색 치마를 입고 옆으로 앉아 화면바깥을 응시한다. 소의 목덜미에 올라탄 아이는 두 팔을 늘어뜨리고 허리를 드러낸 채 편하게 엎드렸다. 소 뒤에서 얼굴만 내 민 아이는 미소를 짓는다. 소 등에 올라탄 한복을 입은 아이는 퉁소를 부는 중이다. 모두들 퉁소 소리에 귀를 기울인다. 동심에 가득 찬 표정이 꽃보다 아름답다. 양달석의 마음은 영원한 아이였다. 행복했던 기억 을 그리며 따뜻한 동심을 펼쳤다. 가난이 그림자처럼 따 라다녔지만 마음만큼은 햇살로 가득 찼다. 「소와 목동」은 5월에 더 빛나는 그림이다. 연신 아 동학대와 사고가 뉴스를 장식한다. 끔찍한 사건이 터질 때마다 아이들에게 미안한 마음이 앞선다. 아이가 다치면 세상이 진통한다. 아이는 꽃이다. 꽃 이 밝아야 들판이 환해진다. 아이들에게 「소와 목동」에 나오는 아이들처럼 꿈꾸는 눈빛을 찾아주고 싶다. 7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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