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1 법무사 10월호

의 발단이었다. 의뢰인 할머니는 6·25전쟁으로 가산이 풍비박산 나고 형제들이 뿔뿔이 흩어져 극심한 생활고로 평생을 고단하게 살아왔는데, 국가가 이렇게 독립유공자 후손 을 박대할 수 있느냐며 연신 눈물을 쏟았고, 암호기술자 인 점잖은 할아버지는 그 할머니를 다독이며 방법이 있 을 것이라고 하면서 내게 이중호적인 이유를 설명하기 시작했다. 다소 격앙된 어조로 어두웠던 시절, 행정력의 공백 과 편법, 부조리 등이 모두 동원되었다. 나는 상황설명을 듣는 동안 묵은 서류더미들 가운데서 먼저 독립유공자 후손으로 선정된 큰오빠라는 분의 가족관계등록부와 제적부, 그리고 그 전대 선친들의 제적부들만을 따로 분 리하고, 같은 집안의 남매라고 주장하는 의뢰인의 가족 관계등록부와 제적부, 그리고 그 전대 선친들 제적부를 분리해 내서 양쪽 집안의 구성원들을 대조해 보았다. 양쪽 가계를 비교해 보니 큰오빠의 제적부는 충남 예산군을 본적으로, 조부 김O배(독립유공자), 부 김O석, 모 편씨 슬하에 “김맹O”, “김문O”, “김인O” 3남매가 기 록되어 있었다. 반면 의뢰인의 제적부는 경기도 평택시를 본적으로, 조부의 기재는 없고, 부 김O섭, 모 김O순 슬 하에 “김익O”, “김문O”, “김명O”, “김연O” 4남매였다. 암호기술자 할아버지는 의뢰인의 제적부에 기록 된 부모와 형제자매는 모두 허무인들이고, 6·25사변으 로 호적이 불타서 1954년 재제되는 과정에서 풍문과 탐 문으로 가호적을 만들어 사용한 것이라고 했다(「민법」 은 1958.2.22. 법률 제471호로, 「호적법」은 1960.1.1. 법 률 제535호로 제정되었으므로 당시는 「조선민사령」, 「조 선호적령」 및 「호적임시조치에관한군정법령」에 따랐다). 의뢰인의가족관계등록부상부모·형제는모두 ‘허무인’ 나는 그런 경위는 참작할 만하지만 법원을 설득하 기 위해서는 두 집안의 연결고리를 찾아야 한다는 점을 설명하고, 동행한 젊은 조카들에게 서류를 대조하는 동 안 의뢰인 할머니를 가까운 주민센터로 모시고 가서 허 무인들에 대한 가족관계등록사항별 증명서와 주민등록 표를 발급받아 오라고 시켰다. 의뢰인의 주장대로 형제자매들이 허무인들이라면 주민등록 정보를 찾을 수 없을 것이고, 실재하는 사람들 이라면 「개인정보보호법」을 이유로 발급을 거부할 것이 기 때문에 불발될 것을 알았지만 먼저 허무인 여부를 명 확히 해야 했다. 수 시간째 기록을 검토하는 동안 주민센터 담당 공 무원으로부터 전화가 걸려왔다. 내가 이중제적사건의 경 위와 주민등록표 발급 자격을 설명하는 과정에서 수화기 너머로 들리는 민원인과 담당 공무원의 응대 정황을 통 해허무인들로지목된사람들에대한주민등록표색인부 를 찾을 수 없다는 사실을 알아차리고는, 아쉬운 대로 주 민등록표 발급신청서에 담당 공무원으로부터 ‘조회되지 않음’이라는문구와날인을받아오라고일렀다. 그러나 담당 공무원도 상속과 관련된 민감한 문제 임을 직감하고 끝내 거부하여 의뢰인은 빈 신청서만을 가져왔다. 나는 일단 의뢰인 일행에게 근거 법리를 찾아 사건 구성이 완료되면 전화로 가부를 알려드리겠다고 하고 돌려보냈다. 그러나 의뢰인 할머니와 암호기술자 할아버 지는 주민센터를 통해 허무인임을 직감한 나의 태도를 알아보고 이미 확신을 얻은 듯 문을 나서며 잘 부탁드린 다는 신신당부와 함께 “법무사님은 이렇게 똑똑한 머리 를 타고나게 해주신 모친께 감사드려야 한다”면서 믿고 좋은 소식 기다리겠다는 말을 남기고 돌아갔다. 나는 의뢰인 할머니의 간절한 부탁을 외면하기 어 려웠다. 나라의 독립을 위해 만주로, 연해주로 떠돌며 생 사를 넘나드는 전투와 가혹한 고문 끝에 비참한 생을 마 감할 수밖에 없었던 독립운동가들은 물론이고, 그와 같 은 선대의 희생으로 제대로 된 교육도 받지 못한 채 광 18 법으로본세상

RkJQdWJsaXNoZXIy ODExNjY=