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1 법무사 10월호

는 권리자를 저격해 쓰러뜨린다. 시효에 대한 경험이라곤 없는 장삼이사나 시효에 대해 가르쳐 줄 사람 하나 없는 갑남을녀는 시효를 놓치기 일쑤이다. 그들은 액면 에만 신경을 쓸 뿐, 그 효력에는 둔한 경향을 보인다. 시효를 넘긴 차 용증을 품에 안고 의무자를 찾아가 봐야 외면을 받기 마련이다. 법의 제국에서 시효를 넘긴 자에게 용서란 없다. 기간에서 돌 아서면 끝이다. 법의 문을 두드리며 자비를 구하더라도 한번 닫힌 시 효의 문은 열리지 않는다. 시효는 권리의 죽음으로 일대의 사건이다. 기간을 넘기는 순간 그것은 권리자를 사슬로 묶고, 의무자에게는 날 개를 달아준다. 권리는 아무리 오만하고 시건방져도 시효의 손아귀 안에 있다. 제아무리 방자하게 굴던 권리도 시효 앞에 서면 왜소해지고 만다. 시 효가 만료되면 증서의 주인은 권리자가 아니다. 그 증서는 폐지와 다 름 아니므로 고물상이 그것의 주인이 된다. 시효를 넘긴 증서를 누군가 가져오면 나는 그에게 한마디로 선 언을 한다. “이 증서에는 꼭 있어야 할 시효가 사라졌소.” 그러면 권리자는 그제야 무지의 잠에서 깨어나 가슴을 후려친 다. 그는숨이막히는태도로변한다. 자신의실수가너무뚜렷해서다. 권리는여전히반짝인다. 시효가남아있다면 시효를 넘긴 증서는 칼로 도려낸 듯 구덩이가 깊이 파여 있다. 권리가 머물던 자리는 빈자리이다. 구덩이에 고여 있던 시린 바람이 권리자의 가슴을 쿡쿡 찌른다. 권리가 떠나 부패한 증서는 죽은 시 신처럼 노려본다. 이해관계인은중얼거리지만, 귀신도귀기울이지않는다. 설사신 이강림한다고해도시효를넘긴자를궁지에서끌어내주지못한다. 그가 이해관계인이라면 액면보다 기간을 신앙처럼 섬겨야 한 다. 그런데 법의 문외한인 이해관계인들은 대개 액면만을 주인처럼 섬긴다. 권리는 기간이 있어야 했고, 법은 기간을 주었다. 기간은 권 리자의 소홀로 증서에 뿌리를 내리지 못하면 머물던 자리를 떠나야 한다. 이해관계인의 과실로 증서는 죽은 몸이 된다. 자기가 모르고 한 것이지만 그를 곤경에서 구제해줄 사람이 법치 안에는 없다. 그는 잘 알아듣지도 못하면서 기간을 챙기라는 주의를 홀딱 삼켜버린 것이다. 시효가 끝날 때까지 액면만 곧이곧대로 믿었던 것이다. 금고의 불을 끄고 어둠 속에 묻혀 있 어도 권리는 여전히 반짝인다. 시효가 남아 있다면. 그것을 보관하고 있는 집이 무너진 다고 해도 권리는 살아남는다. 시효가 남아 있다면. 그러나 시효가 만료되면 커다란 말 썽을 일으키고 울분의 씨앗이 된다. 집안의 상속인 중 누군가 그것을 발견 한다고 치자. 고인이 막 떠난 안방의 다락방 이나 장롱에서. 그들은 증서를 읽어보는 순 간 깜짝 놀라서 나에게 가지고 오곤 한다. 그때 나는 그들에게 일침을 놓을 뿐이다. “이미 때는 늦었소.” 그들이 그것을 책상 위에 펼쳐놓고 손 바닥으로 쓰다듬고 어루만져도 소용없다. 그것이 더는 파닥거리지 않는다. 더는 내일 을 향해 날지도 못한다. 시효가 끝났으므로. 모든권리에는자기만의자리가있다 모든 권리에는 자기만의 자리가 있다. 그 자리의 높이를 결정하는 건 법도, 권력도 아니다. 그것은 시효이다. 권리마다 자기에 게 맞는 높이의 자리를 가지고 그 권리를 누 리는 자를 내려다본다. 그가 게으름을 피우고 잠이 들면 권리 는 자리를 박차고 그를 떠난다. 이것은 고집 이 아니다. 시효의 타고난 성향이다. 그 누 구도, 그 무엇도 말릴 수 없다. 시효를 넘긴 사건은 죽은 것이나 진배 없다. 권리라는 영혼이 떠나버린 사건은 시 체와 다름없다. 뒤늦게 사건을 아무리 흔들 어도 반응이 없다. 8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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