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1 법무사 10월호
쌓여있거나 제대로 펼쳐보지 못한 새 책도 있고, 필요한 책을 찾을 땐 몇 시간을 보내야 할 때도 있다. 장한종은 집안 대대로 화원 화가였다. 그는 자신의 가문과 쌍벽을 이룬 유명한 화원 가문인 김응환(金應 煥, 1742~1789)의 딸과 혼인하였다. 아들 장준량(張駿良)과 손자 장동혁(張東赫)도 화 원이 되어 대를 이었다. 장한종은 왕이 관리하는 ‘차비 대령화원(差備待令畵員)’으로 ‘책거리 그림’을 잘 그렸으 며, 물고기, 새우, 게 등 어해도(魚蟹圖)로도 유명하다. ‘책거리 그림’은 책과 연관된 여러 가지 기물을 의 미한다. 책거리를 그린 것을 ‘책가도’라고 부른다. 장한 종의 「책가도」는 8폭 병풍이다. 책가도 그림은 장식장인 가구 역할도 한다. 책이 주인공이지만 주인의 취향을 들 여다볼 수 있는 특징이 있다. 문방구, 차 도구, 청동기, 화 병, 향 도구, 생활용품 등 귀중한 물건이 소장되어 있다. 상서로운 동물인 용과 기린이 있고, 꽃과 과일, 물 고기도 장식된다. 서재를 꾸미는 「책가도」는 과거에 합격 하고, 정계의 진출을 기원하는 뜻에서 상징성이 강한 기 물들로 이루어져 있다. 책거리 그림은 영조 때 시작되어 정조 때에는 그림 의 주제로 각광을 받으며 다양한 종류의 책거리 그림들 이 등장했다. 조선시대부터 왕 뒤에는 「일월오봉도」가 있었지만, 정조는 「책가도」 병풍을 두었다. 책을 가까이 하고자 한 정조의 책 사랑이 책거리 그림의 유행을 만들 었다. 정조는 시간이 없을 땐 책을 만져보기라도 해야 한다며 신하들에게 독서를 권장했다. 그런 정조의 마 음을 헤아린 「책가도」는 단원(檀園) 김홍도(金弘道, 1745~1806?)를 비롯해 장한종이 잘 그렸다. 서양화의원근법·음영법가미해입체감부각 장한종의 「책가도」는 책과 기물이 있는 다른 책가 도의 그림과 다르게 책장에 커튼을 만들어 책을 감춘 듯 은근한 멋을 부렸다. 특히 그림의 구도와 주제가 참신 하여 정조의 마음을 사로잡았다. 8폭 병풍인데, 양쪽 끝 2폭에 커튼을 드리워 6폭 같은 느낌을 준다. 4폭과 5폭이 책장의 중심이 되어 책 과 기물의 위치를 반대로 향하게 한 센스가 돋보인다. 투시도법 사용으로 공간과 기물의 조화가 한눈에 들어온다. 서양화의 원근법과 음영법을 가미하여 입체 감을 살렸다. 오른쪽 2폭에는 문 한 짝을 열어 놓아 그 속에도 책이 가득하다는 것을 보여준다. 채색은 안정감 있는 짙은 적색의 책장에 서적의 표 지를 청색과 적색으로 적절하게 칠했다. 금빛을 띤 황색 의 커튼에는 쌍희자(囍) 마크를 그려 놓아 품격을 높였 다. 커튼의 안쪽은 청색이고, 바깥의 천은 황색인 2차 보 색을 가해 분위기가 은은하다. 책장에는 책과 더불어 고급스러운 기물을 배치하 여, 자세히 들여다보게 한다. 도자기와 향로, 붓과 먹, 벼 루, 연적 같은 문방구류도 책장 곳곳에 장식되어 있다. 중국에서 수입한 청색 도자기에는 몇 송이의 참꽃이 꽂 혀있고, 고가의 유리병과 진귀한 과일, 괴석이 있다. 선비를 상징하는 부채와 잉어도 그려 놓았다. 왼쪽 장막 사이로 보일 듯 말 듯 인장함을 그려 놓고, 그 위에 ‘장한종’ 낙관을 찍었다. 작가의 기량과 재치에 감탄할 수밖에 없다. 학문과 문화로 정치를 펼치고자 한 정조는 인문학 의 중요성을 강조하였다. 궁중에서 그려진 책거리 그림 은 민화의 소재로도 채택되어 대중에게 전파된다. 민화 는 책과 과일, 물고기, 기물을 조합하여, 고상하고 세련 된 구성을 통해 독특한 조형미로 발전시켰다. 만약 내가 책가도를 그린다면, 무엇으로 화폭을 채 우게 될까? 아마 오랫동안 가까이한 책들을 중심으로 구성하지 않을까. 오늘의 내가 있기까지, 내 마음을 살 찌운 책들과 독자에서 저자가 되어 쓴 내 책들을 정성껏 그려 넣을 것만 같다. 그중에는 시집과 소설책도 있고, 각종 인문서도 있 겠지만 무엇보다 많은 책은 미술책일 것이다. 물론 한쪽 에는 어린 나를 설레게 했던 『어린 왕자』도 배치할 것이 다. 그날의 코스모스와 그때의 여우와 장미도 함께. 책 에 눈이 가고, 「책가도」가 가슴에 와닿는 걸 보니, 가을 인 모양이다. 8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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