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 법무사 7월호

양귀비밭」(1873)은 소박하고 서정적인 묘사로 많은 사 랑을 받고 있는 작품이다. 당시 모네는 보불전쟁에 징 집되는 것을 피해 한동안 영국에 머물렀다가 이제 막 귀향해 파리 근교의 ‘아르장퇴유’라는 작은 시골마을 에 터전을 마련했다. 사랑하는 아내 카미유, 그리고 아들 장과 경제적 으로는 다소 부족하지만 행복한 시절이었다. 5년간 아 르장퇴유에 머물면서 그는 계절에 따라 변하는 일상의 풍경을 화폭에 담았다. 젊은 모네가 그려낸 아르장퇴 유의 사계절은 말년에 그린 수련 시리즈처럼 완숙하지 는 않지만 정감이 넘치는 묘사로 우리에게 더욱 친근 하게 다가온다. 하얀 뭉게구름이 펼쳐진 쾌청한 푸른 하늘 아래 흐드러지게 핀 붉은 양귀비 밭 한가운데를 화가의 사 랑하는 아내와 아들이 거닐고 있다. 뒤편의 인물들 역 시 모네의 지인들일 것이다. 지루하고 평범해 보일 수 있는 풍경화는 화가가 빛과 바람에 따라 꽃잎과 풀잎이 변하는 것을 다양한 색채와 다듬지 않은 붓 터치로 빠르게 묘사함으로써 생생해졌다. 형태의 자세한 묘사보다는 색채로 이미지 를 전달하고자 하는 인상주의의 특징이 돋보인다. 화가의 시선 속에 머물렀던 짧은 시간의 조각은 미완성처럼 보일 수 있지만 우리는 오히려 편안함을 느낀다. 화법 덕분일 수도 있겠지만 무엇보다도 단순한 자연의 풍경이 아닌 사랑하는 가족과 함께한 화가의 소중한 시간이 담겨져 있어서가 아닐까? 말로 구구절절 길게 설명하지 않아도 시공간을 넘어 화가의 따뜻한 시선을 느낄 수 있는 이 이심전심 의 현상을 어떻게 설명할 수 있을까? 언어로부터 해방된 “무언가(無言歌)”, 형태에서 벗어난 인상파의 그림처럼 상상력 자극 유복한 가정에서 태어난 덕분에 “가장 행복한 삶 을 살았던 음악가”라는 별칭이 붙는 펠릭스 멘델스존 (1809-1847)은 1828년부터 1840년까지 49개의 무언가(無言歌) 를 작곡한다. 가곡 형식으로 뚜렷한 멜로디와 반주부로 나누어지 지만 성악 없이 피아노 혼자 연주하는 짧은 소품인데, 초보자도 연주하기 쉬워 즐겨 연주되고 있다. 형식보다는 멜로디의 흐름에 치중하는 자유로운 형식으로 당시 유행했던 낭만주의 영향을 받은 이 곡은 멜로디만으로도 작 곡가가 악상을 느꼈던 찰나의 순간을 유추할 수 있다. 멘델스존의 삶처럼 잔잔하게 흘러가는 멜로디는 마치 다락방에서 발견된 오 래된 사진첩의 사진을 한 장씩 꺼내어 우리에게 보여주는 듯하다. 청각이 주는 시각적 효과랄까? 서정적이면서도 짧은 멜로디 는 우리에게 기억이 아닌 추억을 선사하며 이 감정이 작곡가의 것 인지 아니면 나의 것인지 알쏭달쏭하게 만든다. 운문보다 더욱 함축적인 무언가는 작곡가가 무언(無言)의 예 술이 가지는 힘에 확신을 가졌음을 보여준다. 언어로부터 해방된 멜로디는 형태로부터 벗어난 인상파의 그림처럼 감상자의 상상력 을 자극하며 그 의미가 확장된다. 하지만 이러한 자유로움은 누구 나 수긍할 수 있는 보편적 감정에 기인한다. 평생에 걸쳐 작곡된 무언가는 6곡씩 추려져 순차적으로 발 표되었는데, 대부분의 제목은 출판업자나 후대에 붙여졌다. 모두 느끼고 경험하는 것이 다른 법인데, 시간이 지난 지금도 노래와 제 목 사이에 이질감이 느껴지지 않는다. 그중 1번인 「달콤한 추억」은 “무언가”라는 새로운 장르를 알 리는 시작점이다. 앞으로의 여정이 작곡가의 아름다운 추억들을 모아놓은 것을 알리는 듯한 제목이다. 순차적으로 진행되는 단순 한 멜로디의 반복은 듣는 이의 마음을 어루만지며 서서히 지나가 버린 시간 속으로 이끈다. 음악을 들으며 눈을 감으니 양귀비 꽃밭을 거니는 아내와 아 들을 보며 행복해하는 젊은 화가의 모습이 떠오른다. 그리고 추억 을 따라 멜로디를 흥얼거리며 피아노 앞에 앉아 사각사각 음표를 그리는 젊은 멘델스존의 모습도 떠오른다. 화폭에 담긴 모네의 아르장퇴유에서의 추억처럼 멘델스존의 무언가에도 작곡가의 아름다운 시간이 박제되어 있다. 이렇게 멈 추어버린 시간은 무언의 예술을 통해 우리 사이에 생생하게 부활 한다. 참으로 신비한 일이다. WRITER 최희은 미술·음악 분야 작가 · 번역가 79 2024. 07. July Vol. 68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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