광주광역시장 감사장, 그리고 지 역민들의 뜻을 담아 담양군에서 수상하는 ‘담양군민의 상(2016)’ 과 법조계의 대표적인 봉사상인 법조봉사 대상(2018)까지, 지금 까지 그가 받은 표창장만 30여 개에 이른다. “1982년이었나, 제가 신문 에서 우연히 기사를 보게 되었어 요. 한 학생이 수술비가 없어 심 장판막 수술을 받지 못하고 있 다는 내용이었죠. 안타까운 마 음에 돕고 싶었어요. 그래서 당시 제 봉급이 2만 5천 원 쯤 됐는데, 3만 원을 기부했습니다. 이후 수술은 잘 되 었다고 하더군요.” 당시 생계를 꾸리기에도 빠듯한 시절이었지만, 그 는 근검절약해서 모든 돈을 선뜻 내어놓았다. 이 일을 계기로, 그는 형편이 어려운 아이들을 위해 본격적인 나눔 인생을 시작한다. “심장병을 앓는 아이, 서울대 법대에 합격했지만 등 록금이 없는 아이, 법원에서 마주하는 위기 청소년들, 그 런 아이들을 그냥 지나칠 수가 없더라고요. 갈 곳 없는 아이를 집으로 데려와 지내게 한 적도 있고, 그 아이의 어머니를 수소문해 목포에서 찾은 적도 있었죠.” 이후 그의 나눔은 개인을 넘어 담양지역 사회로까 지 확장되었다. 1984년부터 수북경로당에 후원금과 물 품을 전달했고, 1999년 법무사로 개업한 후 2006년부 터는 수북면의 독거노인과 기초생활수급자 가정을 위 해 매년 연탄 1,000장을 기부하는 일도 20년 가까이 이어오고 있다. 또, 장애인 단체, 다문화 가정, 탈북민, 보육원생, 불우청소년을 위한 후원과 모교 후배들에게도 꾸준히 장학금을 후원해왔다. 지금까지 그가 기부한 금액만 5 억 원을 훌쩍 넘는다. 특히 2015년 광주유니버시아드대회 기간 중에는 카리브해의 빈국인 아이티의 태 권도 선수가 태권도 장비도 없이 홀로 참가했다는 언론 기사를 보고 장학금 100만 원을 전달 한, 감동적인 일화도 있다. 그의 봉사활동에는 쉼이 없 었다. 법무사로서 무료 법률상 담 봉사만도 지금까지 5,000회 가 넘는다. 그 밖에도 중·고등학 생 대상 예절교육, 학교폭력 예 방 강의, 유해업소 단속, 교통질 서 캠페인, 보호관찰 대상자 인 성교육, 소년원생 대상 서예와 한문 지도 등 지역사회를 위한 다양한 활동을 해왔다. “주말마다 소년원생 아이들과 서예수업을 하며, ‘개과천선’과 같은 한자성어를 가르치던 기억이 나네요. 그때 이후 한 10년쯤 지나 한 호텔을 방문했는데, 그때 소년원생 아이가 지배인으로 일하고 있더라고요. 우연 히 택시를 탔다가 운전기사를 하고 있는 그 시절 제자 를 만나기도 했고요.” 아이들이 어려운 시절을 극복하고, 사회의 일원으 로 잘 살아가고 있다는 소식을 들을 때면, 그렇게 기쁠 수가 없다고 한다. 널리 퍼트려라, 그만의 아주 특별한 기부철학 “요즘처럼 법무사 시장이 어려웠던 적은 없었던 것 같아요. 99년 개업 이후 이렇게 힘든 시기는 처음입니 다. 직원들 월급 주기도 빠듯할 때가 많아요. 마이너스 통장을 쓰고 있죠. 하하.” 그럼에도 그는 매달 이어지는 정기 후원만큼은 한 번도 거른 적이 없다. “그건 제 자신과의 약속이니까요. 아무리 어려워 “주말마다 소년원생 아이들과 서 예수업을 하며, 한자성어를 가르 치던 기억이 나네요. 한 10년쯤 지나 한 호텔을 방문했 는데, 그때 소년원생 아이가 지배 인으로 일하고 있더라고요. 아이들이 사회의 일원으로 잘 살 아가고 있다는 소식을 들을 때면, 그렇게 기쁠 수가 없습니다.” 법무사 시시각각 법무사가 사는 법 5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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