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헌절 오후, 강남역 인근에는 장대비가 퍼붓고 있 었다. 쏟아지는 비를 뚫고 목적지에 도착하니, 백발의 머리카락, 단정하지만 센스 있는 옷차림, 화려한 반지와 시계로 멋을 낸 중년의 남자가 반갑게 인사를 건넸다. 정상훈 법무사(서울중앙회)였다. 그의 사무실은 언뜻 보면 평범한 법무사 사무실 같았지만, 자세히 보면 매우 특별했다. 문을 열고 들어 서자마자 보이는 마네킹과 여성복, 화려한 여자구두가 책장 안을 장식하고 있었고, 그 옆에는 법률관련 서적 을 비롯해 다양한 분야의 책들이 꽂혀 있었다. 테이블 앞에 놓인 칠판에는 “천천히, 여유 있게, 차 분히, 꼼꼼히, 꾸준히 성취하자.”라는 말이 적혀 있었다. 어딘가 부조화스러우면서도 조화로운 이 사무실의 주 인인 그가 오늘의 주인공이다. 멀리서 보면 모범생, 가까이서 보면 괴짜 정상훈 법무사는 고려대 법학과를 졸업하고, 법원 행정고시를 합격한 후 23년이라는 오랜 법원 공직생활 을 거쳐 법무사가 되었다. “법원행정고시를 거쳐 20여 년간 법원에서 공직생 활을 했다고 하면 모르는 사람이 볼 때는 모범생 혹은 평범한 사람이라고 생각할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러나 저는 평범한 것과 반복적인 일을 굉장히 싫어하는 사람 이었어요.” 사실 그의 꿈은 법원공무원이 아닌 영화감독이나 발명가, 혹은 일론 머스크 같은 사업가였다. 사업가로 대성한 아버지의 영향을 받아 자연스레 여러 분야의 사업에 관심이 많았고, 특히 젊은 시절에는 패션회사 입사를 지원했을 정도로 패션에 대한 관심과 조예가 깊 었다. 하지만, 생계와 안정이라는 현실적 이유 때문에 뒤 늦게 법원공무원의 길을 선택했다고 한다. “공탁관으로 근무하던 시절에는 노란 머리에 귀걸 이를 하고 출근할 정도로 눈에 띄는 스타일을 하고 다 녔어요. 그게 저에게는 개성을 표현하는 장치이자 작은 반항 같은 것이었죠. 그 당시에는 굉장히 파격적인 일이 어서 공중파 방송에도 출연한 적이 있었습니다.” 보수적인 법원 조직에서 독특한 개성을 가진 그가 어떻게 적응하고 일했을까 궁금했는데, 인터뷰를 위한 사전 준비 과정에서 자신이 법원 재직시절 ‘법원회보’를 기획하고 편집하는 일을 했었다며, 필자의 노고를 헤아 려 격려해 주었다. “법원회보가 지금은 많이 발전해 있지만, 당시만 해도 재미가 없어 독자들에게 버려지고 외면받는 잡지 였어요. 제가 기획을 맡고 나서 ‘어떻게 하면 독자들이 재미있게 볼 수 있을까?’를 밤낮으로 고민하며 획기적 으로 바꿔보자고 다양한 제안을 했습니다. 이를테면 회보의 이름도 「법원사람들」로 바꾸고, 직급 순으로 구성되던 지면 배열도 확 바꿔서, 뒤쪽에 적은 분량으로 게재되던 9급 공무원들의 이야기를 앞 쪽 지면에 배치하고 분량도 확 늘린 거죠. 사실 가장 재미있는 이야기가 9급 공무원들 이야 기이거든요. 역시나 그랬더니 반응이 아주 뜨거웠습니 다. 아마도 그때가 ‘내 인생의 전성기’가 아니었을까 싶 어요.” 보수적인 조직에서 다행히 개성에 잘 맞는 일을 맡 아 나름 재밌게 사셨구나, 생각하던 차에 그의 뒤편으 로 “라이언의 보물섬”이라고 쓰인 작은 간판 하나가 시 선을 끌었다. “아, 이거요? 제가 지난달까지 과천에서 ‘라이언의 보물섬’이라는 상호로 여성의류, 패션잡화 판매 사업을 했었어요. 패션에 워낙 관심이 많아 패션 관련 사업도 해보고 싶었거든요. 지금은 잠시 쉬고 있는데, 내년쯤 강남에 재오픈을 계획 중입니다.” 멋을 내는 센스가 어쩐지 남달라 보인다 싶었는데, 현재 시니어모델로도 활약 중이란다. 재능도 많고 호기 심도 많은 그는 ‘언뜻 보면 모범생, 자세히 보면 괴짜’라 는 말이 딱 어울리는 것 같다. 51 2025. 08. August Vol. 69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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