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73년 10월 말 어느 날 밤 10시경, 단풍이 막바지 에 달한 설악산 오색 약수터 냇가에 도착했다. 200km 행군의 첫날, 점심을 먹은 뒤 미시령 초입 훈련장을 떠나 야영지로 정해진 곳이었다. 배낭을 벗고 비스듬히 기대었다. 보름이었던가. 하 늘에는 휘영청 밝은 달이 떠 있었다. 안도의 긴 숨이 절로 나왔다. 배낭 속에서 손에 잡 히는 대로 고참들이 챙겨준 음료수 하나를 꺼냈다. 포 도 주스였다. 껍질과 씨가 제거된 부드러운 알갱이가 타는 입안을 적셔 주었다. 뚜껑을 따려던 순간, 캔에 붙은 작은 메모가 눈 에 들어왔다. 달빛 아래 별 처럼 반짝이던 여덟 글자. “살아남는 게 최고다.” 유신이 선포된 1972년 10월 17일에 입대했으니, 꼭 1년 만에 유격 훈련에 나선 셈이었다. 당시 2년 차가 되면 강원도 원통 인근, 사단 사 령부 근처 훈련장으로 유 격을 가야 했고, 출발 하루 전에는 보초도 면제되며 고참들이 손수 배낭을 챙겨주는 것이 인사과의 전통이 었다. 배낭 안엔 음료수며 간식이 담겨 있었고, 이는 힘든 훈련을 떠나는 졸병에 대한 위로이자 중도 탈락하지 말 라는 무언의 경고이기도 했다. “살아남는 게 최고”라는 말을 곱씹으며, 발가락에 물집이 생기고 터지기를 몇 차례 반복한 끝에 그 고된 훈 련을 이겨냈다. 귀대 후, 그 문구의 주 인공과 얼굴을 마주했다. 제대를 몇 달 앞둔 말년 고 참으로, 신학대학을 중퇴했 다던 선배였다. 그날 선배와의 대화를 통해 얻게 된 문장 하나가 가슴에 깊이 새겨졌다. “살아 있음 자체가 행 복이다.” 인생이란 게 어디 뜻 대로만 흘러가던가. 때로 는 폭풍우가 몰아치고, 눈 보라에 갇히며, 천둥번개가 치는 순간도 있다. 나도 예외일 순 없었 다. 이제 칠십 중반. 그간 공·사적으로도 많은 어려 움이 있었다. 괴로움과 슬 픔도 비켜가지 않았다. 그럴 때마다 마음속 깊이 넣어두었던 그 문장을 꺼내 되뇌며, 살아 있음을 감사히 여기며 견뎌냈다. 물 론 앞으로도 그러할 것이다. 올해 2월, 딸의 결혼식 날, 선배의 그 말을 주례사에 담아 딸과 사위에게 선물로 건넸다. 이제 또 다른 삶의 출발선에 선 두 사람에게도 작은 등불이 되길 바라는 마 음으로. 슬기로운 문화생활 내 인생의 명문구 안경수 법무사(경기중앙회) “ 살아 있음 자체가 행복이다.” - 1970년대 군대 말년 선배의 조언 73 2025. 08. August Vol. 69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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