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5 법무사 8월호

은 쇠고기가 들어가는 음식이라도 도라지가 들어가 참기 름에 섞이는 냄새”가 이른 아침부터 코를 찌른다. 부엌 찬모 콩심어미는 뜨거운 솥뚜껑에 연방 기름 을 둘러가며 전유어를 지지고, 딸 콩심이는 부서진 떡이 며 적(炙) 조각을 눈치껏 얻어먹기 바쁘다. 그 옆에서 서 저울네는 생도라지를 소금물에 간간하게 삶으며 후춧가 루, 소금, 깨소금, 파, 마늘을 언뜻언뜻 챙긴다. 갖은 양념 을 한 쇠고기와 도라지, 각종 채소에 잣가루로 장식한 화 양적이 순식간에 만들어진다. 첫 장부터 양반가 잔칫상 차리는 모습이 눈앞에 생 생하게 그려지며, 침이 꼴깍 넘어간다. 식용유가 귀했던 시절, 전유어나 화양적은 혼례나 제사 같은 예식이 있는 날이 아니면 맛보기 힘들었을 것이다. 부엌의 일꾼들은 고된 작업을 하면서도 눈치껏 음식을 얻어먹을 수 있으 니 잔치가 자주 있었으면 하고 생각하기도 한다. 호화로운 혼례를 마쳤으나 여장부 같은 신부 효원 과 유약한 신랑 강모는 시작부터 엇갈린다. 부부는 서먹 한 상태에서 초야를 제대로 치르지도 못한다. 귀한 종손 으로 자란 강모는 사촌인 강실에 대한 연심 때문에 고뇌 하고, 갓난 아들과 처를 남겨둔 채 동경으로 훌쩍 떠나 버린다. 또, 가문의 재산을 어이없이 날리는가 하면, 일 본인 여인을 첩으로 들이는 등 종손답지 못한 언행을 일 삼는다. 나라마저 빼앗기고 허울뿐인 양반가의 권위를 그나 마 끝까지 지키는 것은 효원을 비롯한 종부 3대였다. 시 할머니 청암부인은 이씨 가문에 발을 들이기도 전에 남 편을 잃고 조카뻘인 이기채를 양자로 들여 가문을 잇는 다. 종손을 낳았으나 과부나 다름없는 처지가 된 효원은 청암부인을 정신적으로 의지하며 묵묵히 자신의 자리를 지킨다. • 서민들의 식문화도 등장, 출산 후에는 정화수에 미역국 끓이기 한편, 『혼불』 속에는 양반가의 일상 음식과 서민들 의 구황식품, 인생의 주기마다 맞게 되는 통과의례 음식 들이 차례로 등장한다. 특히 죽 하나를 두고도 작가는 다채로운 서사를 풀 어낸다. “밥은 아무나 해도 죽은 아무나 못 쑨다”는 언 급이 나오며, 양반가에서 웃어른에게 올리는 죽은 찬모 가 아닌 부인이나 며느리, 딸의 몫이다. 정성 들여 끓인 죽은 “담백하고도 은근하며 다습하고도 순결한 기름기” 가 돈다. 통과의례 음식의 시작은 출산 후 삼칠일 동안 먹는 미역국이다. 산모용 미역은 꺾지 않고 새끼줄로 묶으며, 미역값을 깎아서는 안 된다는 금기가 있다. 아기의 수명 이 줄고 산모가 난산을 한다는 속설 때문이다. 아이가 태어나면 새로 길어 올린 정화수에 미역국 을 끓이고 흰쌀밥을 짓는다. 여기에 액운을 막아준다는 시루떡을 더해 삼신상을 차린다. 출산 후 100일, 첫돌에 도 떡이 빠지지 않는데 100일에는 백설기, 첫돌에는 수 수팥떡이 오른다. 관례, 혼례, 회갑 등 생의 주기를 지나고 나면 장례 가, 이후에는 죽은 이를 기억하는 제례가 이어진다. 제사는 살아생전 고인이 좋아하는 음식을 올리는 게 관례다. 매안 이씨 집안 제사에는 주악과 단자, 각종 떡, 밤, 대추, 과일들이 차려진다. 쇠고기 육적과 고명을 올린 어적, 통째로 쪄낸 닭도 오른다. 밥과 국, 나물 등 일 상적인 음식들도 제사에 빠지지 않는다. 호화스러운 음식 들을 차리는 이유는 생전에 마음껏 먹지 못했던 귀한 음 식을 대접한다는 의미도 있다. 청암부인은 죽기 전 아들에게 본인의 제사가 돌아오 면 음식을 풍족하게 해서 동네 사람들에게 후하게 먹이 라고 명한다. 슬피 우는 제사가 아니라 흥겹게 지내는 축제가 되 도록 하라는 것. 이는 가난한 거멍굴의 천민들에게 베푸 는 청암부인의 선물이었다. 삶의 고통도 기쁨으로 승화시키려는, 『혼불』 전체를 관통하는 주제를 읽을 수 있는 대목이다. 77 2025. 08. August Vol. 69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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