법무연구 3권(2012.3)

310 법무연구 제3권 (2012. 4.) 이와 같이 매매사유를 구체화화여 기재하는 것은 田畓賣買가 세종 6년부터 허용은 되지만 부득이한 사유가 있을 경우에 한하여 허용되었으며 , 관청의 立案을 받는다든 다 할 때에 전답매매를 하게 돤 부득이한 사정에 대하여 구체적인 명시가 필요했기 때문이다. 이는 科田法 체제하의 15세기에는 국가에서 전답매매를 지속적으로 억제하 였다는 점을 알 수 있다. 33) 그러나 17세기에 이르러서는‘艱難所致’의 문구가 없는 대신 단순히 要用事 로 표시된 것이 많이 나타난다 34) . 이는 구체적이던 매매사유 기록은 과전법체제의 붕괴와 더불어 전답에 대한 사적소 유권 의식의 성장과 함께 전답매매가 활발해지면서 문기양식에 점차 형식화 되어 남 게 된 것으로 보이며, 이 점은 오늘날의 매매계약에 있어서 특수한 경우를 제외하고 는 매매사유를 契約書에 기재하지 않는다는 점을 고려할 때, 과전법체제하의 15세기 이래 전답매매의 불완전한 소유권 행사와 전근대작인 소유의식의 잔재로 여겨지며 16 세기가 그 과도기로 생각된다. 라. 賣買目的物 의 傳來事由 매도하는 전답을 전답주가 소유하게 된 그 매매목적물의 전래유래를 기재한다. 전 답매매문기에는 파는 전답의 전래사유가 명시되지 않은 것도 있지만 대개는 이를 기 재하여 그 賣物이 어떠한 경로를 통하여 賣主가 소유하게 된 田畓임을 알 수 있게 한 다. 이것은 당시 토지취득의 실상을 알려주는 것으로 16세기에는 ‘妻邊傳來 35) ’, ‘牟衿得’, ‘祖上傳來多年耕作 ’ 36) 등으로 표시되고 있다. 37) 그러나 17세기에 가장 33) 邊太燮, 전게서, 282면. 34) 李在洙, 전게서, 172면-176면의 <표4-6> 時期別 賣渡事由, <표4-7> 賣者의 身分別 賣買事由, <표4-8> 月別 田畓賣買事由 참조. 35) 16세기에 구체적인 전래사유를 밝힌 문건(李在洙, 전게서, 121면 <표3-13> 16세기 賣物田畓의 傳來由來 참조) 중에서 ‘妻邊傳來’가 단연 많은데(전체의 23%), 이는 16세기 전기나 그 이 전에는 妻邊의 토지가 재산확보에 중요한 기능을 했음을 보여주는 것으로 재산상속에 있어서 남녀 均分相續이 행해지고 남자가 처가에 장가들어 사는 당시의 모습을 짐작하게 해 준다. 그 러나 17세기 ‘妻邊傳來’의 전답이 급격히 줄어든 것은(8%-李在洙, 전게서, 177면 <표4-9> 賣物傳來由來 참조)6세기 이후 성리학적 예제가 향촌사회에 뿌리내리면서 , 17세기에 이르면 禮學의 발달과 친가중심의 宗法的 家族制가 확립되어가는 변화상을 보여준다 하겠다. 36) 이것은 조상 때부터 또는 당사자가 오랫동안 경작하여 온 땅이라는 것을 강조하여 자신의 소 유임을 표현한 것으로 보이는데, 국가에서 입안을 받았을지라도 스스로 경작하지 않으면서 타 인의 경작을 금지하는 경우에는 그 토지의 소유를 인정하지 않는, 즉 경작자위주로 토지의 소 유권을 인정하는 점에서 이해될 수 있으며, 과전법 실시과정에서 경작자 소유를 인정해 준 일 단을 보여준다. 37) 李在洙, 전게서, 121면 <표3-13> 16세기 賣物田畓의 傳來由來 참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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