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1 법무사 7월호

위의 세균전부대에서 생체실험 대상자가 일본인이 아닌 것은 자명한 일로써 포로로 잡혀온 적군사병을 실험동물인 흰쥐나 토끼 정도로 생각한 일본인의 사고 방식은 천인 공노할 사건이 아닐 수 없다. 고리고 이 사실 은 일본이 제2차 대전에서 패전하자 이러한 비행을교과서에 수록하지 않을수 없었으나 종전후 일본이 경제부흥을 이루고 경제대국 이 되자 위와 같은 생체실험의 부끄러운 사 건을 감추고저 한 위의 첫시도는 실패작이 되고만것이다. 4) 사람이 자기의 치부를 감추려함은 하나 의 본능이겠지만치졸한사람일수록그런 경 향이 크다. 일본인이 한국을 강제 합방한 1910년 이후부터 제2차 세계대전 종전시까 지 한국인과 중국인에 대하여 저지른 만행중 일본인이 가장 감추려하는 몇가지 일만 예시 해본다. (가) 일본의 한국에 대한 가혹한 식민지정 책이 시행되자 한국인은, 항일독립투쟁을 하 지 않을수 없었다. 기미년(1919년)에 전국적 인 독립만세운동이 전개되자 이를 억압하려 혈안이 된 일본인은 1919, 4, 15, 일본육군중 위 아리타가 인솔한 군인과 경찰이 경기도 화성군 향남면 제암리의 제암리교회에 기독 교인 30명을 소집하여 교회에 가두어 넣고 그 출입문을 폐쇄하고 총격을 가하여 교인을 살해하고 그 증거를 인멸하고자 그 교회를 방화한후 교회 인근의 가옥 30재도 모두 방 화하였는바, 이 만행에 대하여는 종전후 일 l ~ I ~이 에 | 세 | 01 I 본인 기독교도가 몇사랍와서 사죄하였을 뿐 이댜 (나) 1923, 9, 1, 에 일본의 관동지방에 큰 지전이 발생하였다. 이른바 ‘‘관동대진재’’라 하는바 일본인은지진이 나자 이때를 기하여 한국인이 폭등을 일으기려하고 있고 우물물 에 독약을 살포했다고 루머를 퍼트려서 일본 인은 한국인을 닥치는대로 살해하였다. 고 시신이 6천여구에 달한 것이다. (다) 중일전쟁으로 일본군이 중국 남경을 함락 시 킨 1937년 12월부터 그다음해 1월까 지 사이에 일본군은중국인 대학살을자행하 였다. 이당시 살해된 숫자는 무려 34만명이 고 도로상에 방치된 시체를 어느 자선단체에 서 수습하여 매장한숫자가 총 155,337구이 었고 이중에서 어린이 시체가 859구 부녀자 시체가 2,127구 였다는바, 더욱 가공할 일은 중지(中支)파견군사령관 마쓰이 휘하의 장교 들이 100인 참수의 경쟁을 벌여 최고 수훈자 個井소위)가 106명을, 차수훈자(野田小尉) 가 105 명을 참수한 기 록을 세웠다는 사실은 듣는 사랍으로 하여금 경악을 금할 수가 없 다. 특히 한손에 일본도를 들고 다른손에 찹 수한 중국인 머리를들고 자랑스럽게 사진촬 영을한 일본장교의 후손과 가족은 그사전을 가보로 간직하고 있다면 그런 부류가, 또한 찹수의 최고 기록을 세운 일본군 장교의 후 손들이 자기 선대의 만행을 영웅시한다면 그 런 부류가 바로 요즈음에 일컫는 일본의 극 우 보수파라기 보다는 옛군국주의로의 희귀 를 염원하는자들일 것이다. 대만법무섀검외 69 ~

RkJQdWJsaXNoZXIy ODExNjY=