리로쓰고있다. 고러나 전기한 옥파일기 (비망록) 503. 504 쪽에는 「의암이 이병현에게 즉시 파고다공원으 로 가서 학생들을 무마하도록 당부했다. 소식을 듣고 태화관에 날려온강기덕동 10여명의 학생 대표들에게 의암선생이 ‘‘우리는 지금 대한의 독립운동을 평화적이고 당당한 의기 에 가득찬 호기로 진행하고 있는데 학생들과 시민앞에 선 다면 필경 폭동화할 것이니 이는 우리의 당초 목표가 아니 다. 대중을 이끈다면 곧 폭동화하여 공연히 희생을 낼 우려가 있는 것이다. 고러니 고대들학생은곧돌아가온건한방법으로 일본 에게 우리 민족의 평화적 성품을 인식시켜 고들 이스스로 물러나계 하도록하라”고간곡히 타 일러 보냈다.」라고 기술하고 있다. 이는 어 디까지나 장소 변경이 학생들의 희 생 이 없도록 배 려한 것으로 볼 수켓있다. 모 신문의 사설에서 지적했듯이 「문화민족 으로서 타민족인 일본의 무력적 억압과`강압 적 통치에 반기를 들고나선 3 • 1항쟁은 민족 의 긍지와 신념의 민족적 표현이었던 것이며 고 정신은 맥맥히 흘러서 고후 내외에서 일어 난 갖가지 형태의 광복운동의 신호인 동시에 고 근원이 되었고 고 선언은 민족독립의 〈성 전〉으로서 신생 대한민국의 현법 전문에 민족 의 정신적 기조로서 명시되었던 것이다. 3 • 1선언은 다만민족의 독립을 선언하였다 는데 역사적인 뜻이 있는 것이 아니라. 거기 밝혀진 정신은 고매하고 당당하며 이론은 정 연하여 고 전리는 동서고금에 통히는 인류 공 통의 것으로서 음미할수록 옳고새롭게 영원 히 낡지 않을세계 만방에 자랑할국권과 인권 의 선언이다.」라고 했다. 찹으로정곡을 꿰뚫은 평가라고본다. ‘자수’ ‘투항’ ‘체포' 설에 대해서도 신복룡 교수는 매우 애매모호하게 기술하고 있다. 1969.2.11 자 조선일보 ‘독립 운동사 잘 편찬 됐나’ 에서는 「이갑성 선생은 당시 민족대표 33인의 행동이 ‘통고’ 였지 결코 자수란 문구 가 적합치 못한것이라고분개하며 ‘죽음도 무 섭지 않고 양심에도 꺼리는 일이 없어 떳떳하 .... 게 일경에 통고한 것이라고 33인의 비장했던 결의〈·증언했다.」라고 썼다. 고리고 이 기사는 결론적으로 「우리 국민이 계승해야할 3 • 1운동의 숭고한 독립 정신(현 법 전문), 그리고 민족운동의 사표로 추앙 받 아온 민족대표 33인에 대한 재평가의 자세는 어느시인의말대로 ‘마음과붓을삼가고정의 와 불의를 옳게 밝히는’것이어야 하며 결코자 학적인 집필태도는 지양되어야하는것이다.」 라고했댜 신복룡교수의 자중 자애를 간곡히 바란다. 신 성 균 | 법무사, 민족대표33인 유 족회직전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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