先麟 平北 博)||問의 名P거이요 兪器麟工場의 經營主이며, 더욱 洛別한 것은 톄副 李昇蕙先牛 (己未 3 • 1運動의 民族代表33人의 1人으로, 敎育家 요 基督敎界指導者로 全國民의 推仰을 반은 愛國者) 을 實業家로 成長케한 林逸權氏(31]:g: 林博川, 博川郡 守令監)의 後商로서, 家PT의 名聲에 조금도 남부끄러 움없는 86平牛을 사신 高쌤한 人格의 所有者이셨습 니다. 嚴格한 家妃埼女育과 日本 明治大學 法科에서 닦은 該博한 法律智識을 바탕으로한 33年間의 法務士牛 活은他에龜鑑이 었습니냐. 그러나 지난 2月 19 日 牛을 마감한 先牛에게는 쌓 이고 쌓인 恨맺힌 餘恨이 있었음을 그의 自竹號인 댐f客’에서 엿볼수있습니다. 그°相2l-로 거 칠고 돌보는 이 없는 荒野를 거 니는 떠돌이 나그네 人牛이였음이 짐작됩니다. 日本에서 修學後 占雲의 꿈을 품고 歸3卽긴 先牛은 난린힌 家庭의 꿀맛 도 瞬息間8 • 15解放은 先生의 家 門이 企業主요 地主였다는 理由로 北韓共産政權에 肅淸되는 不運으 로, 눈 앞에 展開 되 어가는 悲彦합을 겪는 것도 잠시 民族全體를 悲劇回 도가니속에 쓸어 넣는 6 • 2찮근 先牛-을 더욱 典型的인 슬픔의 주인공으로 만들었 습니다. 홋날 적어 놓은 〈北斗七星〉첫 머리에 「내가 집에서 떠나올 때 부친님이"너무 여러날 지체말 고곧돌아오너라”하시기에 "늦어도두주일 이내로 돌이오겠습니다.''하고 30을 겨우 넘어 떠니온- 것이 이저臣노경에 집어들어 氣力조차님과길지 못하여 牛마저 일마남지 않은듯한데 내가大邱에 온후 家 族들을 생각하고답답한 심정 .. (中略) 후일 天幸으로 살아 남은 내 血肉이 하나라도 있어서 만냐는 機會 가 있다면 나의 家族들(牛 離別한 父 • 母 • 妻• 1 男 • 3女)에 대한 죽도록 죄스러웠던 나의 心情을 傳 하여주시기 부덕하는바이다.」라고쓰여 있습니다. 이 備忘錄에서 先生은 ']t에 남기고 온 子女에게 나는 너희가 자란後의 世界觀을特定하여 强要 하고 싶은마음은추후도없다오직 社會를爲히여사는사람 깨끗한마음씨를기전사람 죽는날까지 공부하는 사립이 되 어주길 바랄뿐이 다. 부디 건강하고 씩씩하게 자리다오. 이 봇난 에비 대안법무사업외 79 I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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