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0 법무사 8월호

대한법무사협회 17 한국전쟁의개전을두고북침설이있어왔다. 1949년봄, 미국은한국군훈련을담당할 500명의병력만한국에남겨두고전병력을미국본토 로 철수하였다. 그리고 6.25 전날인 1950년 6월 24일 토요일 밤, 서울 용산에서 채병덕 참모총장 을비롯한육군수뇌부가주요부대의지휘관들과함께육군장교클럽개관파티를벌려그익일새 벽까지 술과 댄스를 즐겼다. 국군장병의 3분의 1이 주말을 맞아 외박과 휴가를 나갔으며, 육군 수 뇌부가 술에 만취하여 비몽사몽(非夢似夢)간을 헤매고 있을 시각에 북한군이 새벽에 기습으로 38 도선을 넘어왔다. 1990년 옛 소련 국립문서보관소에서 북한의 김일성이 남침을 건의하여 스탈린 의승인을받았고, 중국의마오쩌뚱에게지시하여남침시에중공군을파병하라는문서가발견되 었으며, 북한군은소련제 T-34 탱크로무장을하여 38도선전지역으로물밀듯내려왔으며, 국군 은개전초에탱크한대도없어사상자가속출하였는데국군이먼저북한으로북침을하여스스로 묘지를판다는것은건전한상식밖의일이다. 최초공개된자료에의하면스탈린은처음에는한국 전쟁에미군이개입하지않을것으로판단하여전쟁을승인하였으나, 나중에미군이이전쟁에개 입하자중공군을참전하도록마오쩌뚱에게지시를하여미군과중공군이전투를하는것을은근히 즐겼다는설까지 (미국과중공이피탈나게싸우면양국의전력이소모되어소련이세계제1위의강 국이된다는논리) 있다. 이런여러가지점으로보아지금에와서도남한의북침설을주장하는사람이있다면이는백일 몽환자에지나지않는다. 이상과같이 6월 25일새벽을기하여파죽지세로내려온북한군의남침에의해대한민국은풍전 등화의신세가되었다. 김일성은빠른시일내에남한전역을점령하여 1950년8월 15일을기해서 울에서적화통일의기념식을하기로계획을하였다는것이다. 개전 3일만인 6월 28일드디어서울 은적의수중에떨어지고패잔병이된우리국군은돌아올기약없이끝없는남하를계속하였다. 이전쟁에서국군이승기를잡게된3개의주요전투가있다. 첫째, 개전초기의춘천전투가있다. 춘천전투는 1950년 6월 25일부터 6월 30일까지춘천·홍천일대에서벌어진전투이다. 이전투 는국군제6사단장김종오대령의지휘하에전장병들이일치단결하여소련제탱크로무장한북한 군2사단에맞서일대타격을가하여북한군 24,000명중 40% 이상의전력손실을입혀적군의서 울입성으로부터3일동안춘천입성을지연시켜전쟁초기의국군을보호한것이었다. 이 전투에서 춘천이 바로 함락이 되었다면, 동부전선에서 북한군이 빠른 속도로 남하하여 서울 에입성한북한군과동부전선의북한군이연결을하여대부분의국군병력을완전포위하려는계획 이서있었는데춘천전투에서시일이지연되는바람에국군이포위망을벗어나게된것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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