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1 법무사 6월호

탈출 성공, 오십 리 빗속을 걸어 집으로 돌아와 낙동강 전투에서 많은 병력을 잃은 후 전투병이 부족하게 된 북한정부는 도시와 농촌에 있는 청년과 장년들 을 마을 인민위원장과 노동당원을 앞세워 밤을 이용해 저인망으로 고기를 잡듯이 총검을 쥐고 집집마다 찾아 다니며 모조리 인민군으로 끌어냈다. 나는 잘 숨어 지내다가 1950년 9월14일, 동생 생일 날 동 트기 전에 그 저 인망에 걸려든 것이다. 그렇게 먹고 싶던 쌀밥을 냄새도 맡아보지 못하고 잡히다니! 하늘도 무심하시지. 각 면에서 잡혀온 수많은 청년들은 함흥시내에 있는 도 군사 동원부에 집결했는데, 그날 밤 나는 탈출계획을 세우고 책상과 걸상에서 쪼그리고 아무렇게나 자고 있는 사람들 중 나를 따르겠다는 청년 하나를 찾아 함께 야 간탈출을 시도했으나 실패하고, 다시 아침에 시도하기로 했다. 아침밥을 먹고 나는 청년과 탈출계획을 짠 후, 손에 엽서를 들고 정문으로 나갔다. 보초병이 바로 제지하면 서 "어디로 가요? 못나가요"라고 한다. 나는 부모님에게 보낼 거라며 엽서를 보여주고 저기 우체통에 넣고 금 방 들어오겠다고 했지만 보초병은 그래도 못나간다고 막아섰다. "동무는 부모형제도 없소? 엽서만 넣고 금방 오겠다고 하는데 뭐 그렇게 융통성이 없소?" 하고 큰소리를 치니까 그제야 한 풀 꺾이며 "그러면 빨리 갔다 오 시오" 한다. 나는 부지런히 걸어서 우체통에 엽서를 넣고 재빨리 골목길로 피했다. 뒤돌아보니 나를 따라 나오던 청년이 보초병에게 저지당하자 내가 시키는 대로 "저 사람은 나가게 하고, 나는 왜 못 가게 하는 거요?" 하고 큰소리를 하니까 보초병은 "그러면 빨리 갔다 오시오" 하고 내보낸다. 탈출에 성공한 우리는 좁은 골목길로만 걸어 시내에 있는 내 친구 집을 찾아 가다가 공습경보가 울려 급히 가까이에 있는 방공호에 들어갔다. 그런데, 잠시 후 방공호 입구에 인민군 복장을 한 청년이 나타나 우리를 들 여다보고선 손짓을 하는 것이다. '아이고, 이제 또 잡혔구나' 싶어 가슴이 뛰고 입술이 탔다. 어쩔 수 없이 방공 호 밖으로 나가자 그는 "폭탄이 떨어지면 이런 방공호는 그대로 무너지니 위험하다"면서 자신은 중공군의 팔 로군 부대에 있던 조선 사람인데 의용군으로 나와 낙동강 근방에서 교전 중 엉덩이에 파편을 맞아 후방으로 왔 는데 전투경험이 많으니 자기 말을 믿으라고 했다(이 군인을 보더라도 김일성이 남침을 위해 미리 중공에서 의 용군의 지원을 받은 것을 알 수 있다). 공습경보가 해제돼 우리는 그와 헤어져 친구 집 앞에 도착해 오후 6시에 다시 만나기로 하고 헤어졌다. 친구 집에 들어가 보니 친구는 인민군에 나가고, 그의 형이 있었는데 인민군에 나가 낙동강 전투에서 팔꿈치에 총상 을 입었다며 팔에 기브스를 하고 있었다. 형은 전투할 때 전사한 적병(한국군)의 것을 노획했다며 'US' 글자가 찍힌 스테인리스 숟가락과 군용담요를 보여주면서 무슨 보물이나 얻은 것처럼 자랑을 했다. 그러면서 나를 세 뇌시키려고 공산주의는 다 같이 잘 살 수 있다, 인민은 모두 평등하다는 말을 두서없이 늘어놓았다. 나이도 나 보다 4, 5세 위이고, 흥남공대에 다닌다는 사람이 무모한 전쟁에 나가 죽을 고비를 넘기고도 정신을 못 차리니 참 철이 없어 보였다. 6시가 되었는데도 약속한 청년이 오지 않아 나는 혼자 성천강 만세교(萬歲橋)를 건너기로 마음먹고 친구 집 을 나왔다. 만세교 다리목에 와 보니 운 좋게도 진지를 구축하는 인민군과 내무서원이 임무교대를 하느라 감시 가 허술한 틈을 타 무사히 다리를 건널 수 있었다. 나는 강둑 옆의 수수밭에 몸을 숨기고 밤이 되기를 기다렸 다. 곧 어둠과 함께 하늘에 먹구름이 덮이더니 비가 내리기 시작했다. 나는 함흥 벌을 가로질러 우리 집이 있는 남쪽을 향해 걸었다. 오십 리 길을 줄곧 빗속을 걸어 천신만고 끝에 새벽녘 집에 도착해 담을 넘어 들어가니 놀 란 아버지께서 "참 용타" 하고 칭찬을 하셨다. 나이 20에 처음 듣는 아버지의 칭찬이었다. 나는 장롱 속에 깊이 수상 5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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