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1 법무사 6월호

감추어둔 태극기를 꺼내 작게 접어 안주머니에 넣고, 호신용 단도를 만들어 몸에 품고 밤에만 나다니면서 죽는 한이 있더라도 다시는 인민군에 붙잡혀 가지 않겠다고 다짐했다. 한국군 입성, 태극기 흔들며 환영“환호성” 보초병을 속이면서 부친 엽서가 인민위원장을 통해 우리 집에 전해진 탓에 온 동네에 내가 인민군에 나간 것 으로 소문이 났으니 밤에 무슨 일을 해도 내가 했다는 오해를 받지 않을 것으로 생각한 나는 밤에 몰래 '빨갱이 명단'이라는 제목 하에 노동당원들 이름을 큰 백지에 붓으로 쓰고 그 옆에 "노동당원들은 경거망동 하지 말고 자숙하라"고 적어 동네 게시판에 붙여 놓았다. 그리고 정몽주의 시를 개작하여 "이 몸이 죽고 죽어 일백 번 고 쳐 죽어 백골이 진토 되어 넋이라도 있고 없고 빨갱이를 응징할 일편단심이야 변할 줄 있으랴"라는 글을 적은 쪽지를 여러 장 만들어 노동당원들의 집 대문 밑에 놓았다. 그것을 본 노동당원들은 섬뜩한 말들에 불안하고 마음이 편치 않았을 것이다. 나는 흥남에서 이사 온 서판동 씨의 외딴 집을 드나들며 그 집에 있는 제니스 라디오로 남한의 서울중앙방송 을 들으며 지냈다. 드디어 9월28일, UN군이 서울을 탈환했다는 뉴스가 나왔다. 나는 한국군이 그 기세로 38선 을 돌파해 북진할 것이 틀림없다고 생각해 한국군만 기다리고 있었다. 그리고 10월1일, 정말로 한국군이 3.8선 을 넘어 북진한다는 남한 방송을 듣고서 나는 숨어 살던 생활에서 뛰쳐나와 마을 앞 높은 언덕에 올라섰다. 마침내 10월19일, 부평역 쪽에서 군인들이 탄 트럭 행렬이 온다는 소문처럼 함경선 철로와 나란히 나 있는 신작로로 한국군 선발부대가 트럭 수 십대에 분승, 요란한 소리를 내며 북쪽으로 천천히 진군해 들어오는 것 이 보였다. 언덕에 모였던 마을사람들은 만세를 부르고 환호성을 지르며 환영을 했다. 나는 해방군을 가까이에서 보기 위해 몸에 숨겼던 태극기를 꺼내 긴 작대기에 매달아 뛰기 시작했다. 그때는 정말로 이번에는 해방이 될 거라고 생각했다. 나는 2km 거리를 단숨에 뛰어 신작로에 다다랐는데, 내가 예상 한 대로 한국군이 선덕비행장 쪽으로 가고 있었고, 트럭행렬의 끝부분과 만날 수 있었다. 트럭이 계속 진행을 하기에 나는 너무도 흥분한 나머지 멈추지 않고 태극기를 흔들면서 트럭 뒤를 따라 계속 뛰어갔다. 이런 행동이 부대장에게 알려졌는지 갑자기 행렬이 멈춰서더니 어떤 장교 하나가 트럭에서 내려 내 게 다가와 화랑담배를 한 개비를 주며 "선덕 비행장에 인민군이 있는 가?"고 묻기에 "며칠 전에 상부에서 전부 깊은 산중으로 숨으라고 지시 했다"고 했다. 나는 며칠 전에 모든 행정기관 요원들과 노동당 당원들 에게 악질 반동분자를 선별해 암살하고 깊은 산중으로 숨으라는 지시 가 내려져 관청은 텅 비고 노동당원들이 어디론가 숨어버린 사실을 알 고 있었다. 며칠이 지나자 숨었던 노동당원들이 속속 나와 자수를 했다. 그들은 내 예상대로 노동당 상부에서 반동분자 5명을 암살하라는 지시가 있었 으나 실행하지 않았다고 자백했다. 그 5명 중에는 나의 아버지도 포함 돼 있었는데, 지시를 실행하지 않은 것은 내가 한국군 입성 전에 노동 당원들에게 경거망동하지 말라는 경고의 글을 붙인 것이 주효하지 않 았나 생각되었다. 60 法務士 2011년 6월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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