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1 법무사 6월호

해병대 입대, 가족과 고향 떠나와 '이산 60년' 1950년 11월 초순이 되자, 중공군이 한국전쟁에 개입해 중순부터 대공세를 취해 왔기 때문에 유엔군이 북한에 서 후퇴하기 시작했고, '흥남철수작전'을 위해 흥남 남 쪽 방어선의 일부에 한국군 해병대가 투입됐다. 그 해 병대 3대대 제6중대가 우리 마을에 진지를 구축했는 데, 우리 마을에서 1개월 정도 임무수행 후 떠날 때 군인들은 중대본부 앞에 도열하고 신형 로켓포 3발 을 부평역 쪽으로 표적 없이 쏘는 경고사격을 했다. 나는 부락의 치안책임자로 일하면서 한국 해병 대를 후원하다가 군번 없이 해병대원으로 완전무장하고 '흥남철 수작전' 방어전에 참가하게 되었다. 다급하여 부모님에게도 3개월 후 다시 상륙해 온다고 만 하고 작별인사도 미처 못 한 채 군장을 갖추고 대오에 섰다. 그때 첫사랑 순녀가 자신의 집 앞으로 나와 나 를 찾으려 두리번거리는 모습이 보였다. 나는 손을 들어 작별의 인사를 전하려 했는데, 순간 그녀가 돌아섰다. 작별의 말 한 마디 못 나누고 머리를 푹 숙인 채 집으로 들어가는 그녀를 보면서 이대로 기약 없이 헤어져야 하는 난세의 사랑, 속절없는 세월에 마 음이 아파왔다. 하지만, 내가 그곳에 있으면 죽임을 당하는 것이 명백한 일이어서 중대장이 내준 군장으로 무 장한 채 전투에 참가할 수밖에 없었다. 이렇게 나는 1950년 12월18일, 부모형제를 집에 둔 채 한국군 해병대와 같이 고향을 떠났다. 곧 나는 미 공군 수송기를 탔는데 이륙할 때 보니까 함흥평야에 살던 사람들이 피란민이 되어 얼어붙은 광포호수 위와 논밭으 로 개미떼 같이 몰려가는 것을 보였다. 나는 불원간 한국군으로서 기필코 고향을 해방시키는 작전에 참전해야 되겠다고 결심했다. 북한에서 철수한 한국 해병대(여단)는 부산 수영비행장에 집결했다가 진해 해병대 사령부에 갔다. 나는 신 병 입소를 기다리면서 쉬고 있었는데, 전황이 좋지 않아 나만 살고 북한의 가족들 모두 나 때문에 죽임을 당할 것이라는 생각이 머리를 짓누르면서 잠도 오지 않고 매일 밤을 눈물로 지새웠다. 나는 중대장에게 어떻게 하든지 가족을 구출해 오는 방법을 강구해 보겠다고 하고 부산으로 나왔다. 몇 달 후 나는 미 육군 8240부대(KLO = Korean Liaison Office, 미 극동사령부 주한연락처)에서 은밀히 모집하는 '북파공작원'에 자원했다. 야밤에 공작선을 타고 훈련소인 어느 섬에 도착 했는데, 섬 전체에 민간인은 없고 각 종 임무의 훈련을 받는 유격대원들뿐인 곳이었다. 나는 이곳에서 제식훈련부터 개인화기(권총, 각종 소총, 경 기관총)의 분해 조립, 각종 무기를 이용한 사격훈련을 받은 후 명사수가 됐고, 훈련을 계속하면서 때가 오기만 을 기다렸다. 그러나 북파는 이루어지지 않았고, 휴전을 맞고 말았다. 전쟁의 시대, 한 치의 앞일도 예측 못하던 죽고 죽이는 시간의 연속에서 나는 살아 있었다. 1954년 3월 어느 날, "복무 중 알게 된 군사기밀을 누구에게도 누설하지 않겠으며 누설하는 때에는 어떤 처벌도 달게 받겠습니 다"라는 서약서를 남긴 채 그 어디에도 써먹을 수 없는 '명사수'라는 꼬리표를 가슴 속에 달고서, 가족은 구출 도 못한 채로 귀향증을 받아 그 무시무시한 섬에서 빠져나와 육지로 왔다. 그렇게 되어 6.25 전쟁은 나에게 이 산가족으로 지금까지 60여 년을 살게 한 것이다. 손을 들어 작별의 인사를 전하려 했는데, 순간 그녀가 돌아섰다. 작별의 말 한 마디 못 나누고 머리를 푹 숙인 채 집으로 들어가는 그녀를 보면서 이대로 기약 없이 헤어져야 하는 난세의 사랑, 속절없는 세월에 마음이 아파왔다. 하지만, 내가 그곳에 있으면 죽임을 당하는 것이 명백한 일이어서 중대장이 내준 군장으로 무장한 채 전투에 참가할 수밖에 없었다. 수상 6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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