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2 법무사 2월호

이윤규I경기대학교 회계세무학과 교수 참지식인 ‘토정 이지함’을 기리며 권두언 이지함, 양반사회에서‘愛民주의적경제사상’펼쳐 토정 이지함은 중종 12년부터 선조 11년(1517~1578)에 걸쳐 살았던 인물이다. 목은 이색(牧隱 李穡)의 후 손이며 율곡(栗谷)의 친구이기도 했다. 토정의 현손 정익(玄孫 禎翊)이 경주 부윤(府尹)으로 있을 때『토정 집』(土亭集)이 간행되었다. 토정은 여러 가지로 후세의 귀감이 되는 선조이지만 특히 재평가해야 할 점은 명문의 양반이면서 몸소 장사에 종사한 상인이며, 애민주의적(愛民主義的) 경제사상을 지닌 선구자라는 사 실이다. 잘 알다시피 조선사회는 유교중심의 행동양식이 지배하고 있는 양반관료사회라 할 수 있겠다. 따 라서 경제활동에 대한 그릇된 인식과 하대(下待)가 당시의 사회에 팽배했다는 것이 일반적인 평가다. 이러 한 시대에 양반 출신으로 애민주의적 경제관을 형성하였다는 것은 놀라운 일이다. 이지함의 자는‘형백’이고 호는‘토정’이며 본관은 한산(韓山)이다. 고려 말엽의 성리학자 이곡과 이색을 배출한 명문가의 후손이다. 이곡(1298~1351)은 목은 이색의 부친으로 원나라 제과에 급제하여 벼슬에 올 라 중국의 문사들과 교류한 뒤 귀국하여 한산군(韓山君)의 봉작(封爵)을 받았으며, 이곡과 이색은 고려 말 과 조선 초에 걸쳐 문명(文名)을 크게 떨쳤다. 이지함은 이치(1477~1530)의 아들로 충청도 보령군 청라에서 태어난 것으로 추정된다. 이지함의 출생지 에 대해 명확히 언급한 기록은 없으나, 묘소가 보령현 서쪽에 있고, 이지함의 위패를 모신 화암서원의 기록 등을 참고하면 이지함의 출생지는 보령군 청라면 장산리일 가능성이 크다. 이지함의 어머니는 광주(光州) 김씨로 판관 맹권의 딸인데, 김맹권은 일찍이 진사가 되고 문명이 높아 집현전 학사로 발탁된 인물로, 세종 의 신임을 받았다. 그러나 단종이 폐위되고 1455년 수양대군이 왕위를 찬탈하자 고향인 보령으로 돌아가 평생 동안 과거를 보지 않았다고 한다. 아버지 이치는 1504년 갑자사화가 일어나자, 이미 사망한 종조부 이파(從祖父 李坡)의 성종 때 폐비사건 에 연루되어 진도에 유배되었다가, 1506년 진성대군을 옹립한 중종반정으로 귀양에서 풀려났다. 이지함이 14세 되던 해에 부친이 작고하자 이지함은 그의 형 이지번에게서 학문을 배웠다. 이지번은 백의재상(白衣 宰相)이라고 불릴 정도로 청렴한 학자였으며, 그의 아들 이산해는 5세에 이지함에게 학문을 배웠다고 한 다. 이산해는 나중에 영의정과 이조판서를 지내면서 북인의 영수가 되는 인물이다. 이지함에게는 산두, 산휘, 산룡의 세 아들이 있었는데, 둘째 산휘는 호랑이에게 물려 죽고, 셋째 산룡은 12살 때 역질로 죽었다. 한편 서자인 이산겸은 임진왜란 때 의병장으로 활약했다. 이지함의 처는 종실인 모 산수 정랑(毛山守 呈琅)의 딸이다. 정랑은 1549년에 이홍남이 아우 이홍윤의 역모사건을 고변하자, 이 사건 4 法務士2012년 2 월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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