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2 법무사 2월호

에 연루되어 장형을 받다가 사망하였다. 장인에게 닥쳤던 정치적 불행은 이지함의 사상이나 행보에 많은 영향을 주었 을 것이다. 이후에 이지함은 자신이 태어난 보령과 서울의 마포를 주된 근거지로 하여 전국을 유람하면서 살게 된다. 아산현감재직시, 걸인청만들고백성구호상소문올려 1573년(선조 6년)에 이지함의 탁행(卓行)이 조정에 알려져 유일(遺逸) 등용책의 일환으로 최영경 등과 함 께 천거를 받아, 1574년 종6품의 포천현감에 임명되었다. 그러나 자신의 상소가 조정에 받아들여지지 않자 사직하고 물러났다. 1578년에 다시 천거를 받아 아산현감에 제수되어 다시 그의 애민주의적 사회경제사상 을 실천할 기회를 갖게 된다. 이지함이 부임하기 직전 조정에서는 아산현감 윤춘수가 백성들을 구휼하지 않고 탐욕에 눈이 어둡고, 병을 칭탁하여 일부러 관직을 그만두었으니 죄를 주자는 논의가 있었다고 한다. 이해 5월에 이지함이 아산현감으로 있을 때 올린 진폐 상소문이 기록된 것으로 보아 이지함은 윤춘수의 후 임으로 당시 아산현의 어려움을 구제할 적임자로 판단되어 임명된 듯하다. 이지함은 이곳에 현감으로 재임하면서‘걸인청(乞人廳)’을 만드는 등 노약자와 고통 받는 백성들의 구호 에 힘을 기울였으며, 자신이 현감으로서 경험한 시무책을 담은 상소문을 조정에 올렸다. 이 상소문에서 이 지함은 백성들의 곤궁한 생활 실상을 알면서도 백성들을 부당하게 군역에 넣어야 하는 실태를 적나라하게 지적하고 선조 또한 그 의견이 옳다고 답하였으나, 이지함이 곧 사망했기 때문에 이 상소문에서 제시한 시 무책은 빛을 보지 못하였다. 당시 승정원의 기록에서는 이지함에 대해 사람들의 이목을 끌고 백성들을 보살피는 데 최선을 다했으며 시무(時務)에도 능했던 호걸로 표현하였는데, 이지함이 백성들에게 인망이 두텁고 시무에 통달했던 걸출한 인물이었음을 알 수 있다. 토정은 경전(經傳)과 백가(百家)를 섭렵하고 천문(天文), 지리(地理), 의학(醫藥), 복서(卜筮), 산수(算數), 관상(觀相)에 능하였다. 군자는 진리를 말하고 재리(財利)를 말하지 않는다고 하던 때장사에종사하였는데, 선고(先考)의묘소를바닷가언덕에정한후조수(潮水)를염려하여공사를하면 서 어상(漁商), 염상(鹽商)과 어울려 온갖 장사를 하였다. 흉년이 들면 가끔 큰 장사를 벌여 그 이득을 가난한 사람들에게 나누어 주었고 항상 자신은 가난에 시달 렸다고 한다. 조선 중기의 문신이요, 학자이며 의병장인 중봉 조헌(重峯 趙憲, 1544~1592)에게도 큰 영향 을 준 스승으로 숙종(肅宗)에 이르러 이판(吏判)에 증직되었다. 토정은 61년의 바람과도 같은 생을 보냈다. 백용부고론(百用府庫論), 인재부고론(人才府庫論), 도덕부고론 (道德府庫論)은 토정사상의 진수(眞髓)이다. 조선왕조 오백년을 통하여 토정만한 참 지식인이 없다. 뛰어난 학식을 가지고 있었고, 사리(名利)를 초월한 인생을 살면서도 끊임없이 자신의 사람에 대한 사랑을 확인한 실천가이다. 당시 양반 신분으로서는 금기시되던 생업에 뛰어들어 막대한 이익을 남기고, 이를 가난한 백 성을 위하여 아낌없이 나누어 주었던 토정의 삶은 이 시대의 지식인에게 귀감이 되기에 부족함이 없다. 조선왕조 오백년을 통하여 토정만한 참지식인이없다. 당시양반신분으로 서는 금기시되던 생업에 뛰어들어 막 대한이익을남기고, 이를가난한백성 을 위하여 아낌없이 나누어 주었던 토 정의 삶은 이 시대의 지식인에게 귀감 이 되기에 부족함이 없다. 5 • 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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