었소’’라고. 기가 막히게 맞아떨어지는 꿈이었던 것이다. 꿈 이야기 끝에 단종은 평민으로 태어나 농촌에서 한가롭게 사는 것이 얼마나 부러운지 모 르겠다는말도하였다. • 단종 사약 받자, 궁녀들 절벽 아래로 몸 던져 1456년, 성삼문 등 소위 사육신이 수양대군을 주살키로 거사한 것이 드러나 만사휴의(萬事休矣) 로 돌아가자, 단종은 노산군(魯山君)으로 강봉되어 (이하, 노산군이라 한다), 1457년 6월 21일에 영월 로 유배령이 내려졌다. 송비도 함께 유배지로 가려 했으나 아들 낳을 것을 염려하여 불허되었다. 당시 의금부 도사(都事) 왕방연이 군사 50명을 데리고 노산군을 호송하였댜 청령포 동쪽 언덕배 기에는 오늘날도 "천만리 머나 먼 길에 고혼 임 여 희옵고…'’라는 왕방연의 시비(詩碑)가 세워져 있 어 당시의 사실僚!實)을 말해 주고 있다. 왕방연은 노산군이 거처할 곳과 군사, 궁노들의 처소를 정 해주고는 작별의 안사를 고했다. 돌아서는 그의 두 눈에는 굵다란 눈물방울이 떨어지고 있었다. 노산군이 답답하고 우울한 연금생활에서 무더 운 여름과 단풍지는 가을을 보내고 나니 초겨울이 돌아왔다. 그는 이제 혈기방장한 17세의 나이가 되었댜 휘영청 달 밝은 밤, 슬피 우는 두견새 소 리는 한양에 두고 온 송비에 대한 그리움을 부채 질하였댜 피맺혀 우는 두견새 소리는 그를 비감 케 하여 자규류에 올라 시 한수를 읊었다. 月 白夜蜀魄敵 令悲情依樓頭 爾口帝悲我開쏭 無爾聲無我悲 휴語世上勞쏭人 愼莫登春三月子規樓 달이 휘영청 밝은밤두견새는우는데,수 싱을 머금고 누에 기대네. 너 울음소리에 나의 가슴괴롭고슬프다.너의 소리 없으 면 나의 근심 없어질 것을,세상의 괴로운 사람들에게 말 붙이노니 삼가 춘삼월에 는 자규루에 오르지 마소. 그 후 순흥부로 귀양간 노산군의 숙부 금성대군 이 이보홈 순흥부사와 의기투합하여 제2의 단종 복 위운동을 꾀하였댜 그러나 부사의 사환인 석동과 금성대군의 시녀 금연이가 열애하는 사이로 종의 신분을 면코자 역모사실을 관가에 고해, 둘은 면천 되고 복위운동은 실패하였다. 이를 계기로 한명회 가 단종을 없애버릴 것을 상주다泉;)하여 1457년 음 력 10월 24일, 사약을 내리라는 윤허가 떨어졌다. 의금부 도사 왕방연이 사약을 가지고 청령포로 내려가 노산군을 만나 “어인 일로 왔느냐'는 그의 물음에 대답을 못하고 울기만 하였다. 이때, 군사 하나가 “유시(酉時)요”라고 형 집행시간을 알려주 어 노산군이 이를 알아차리고 스르르 눈을 감았 댜 이때 노산군의 종놈하나가밧줄한쪽을기둥 에 걸어 노산군의 목을 졸라 잡아당겼고 이내 숨 이 끊어졌는데, 노산군이 사약 내릴 것을 미리 알 고 그리 시켰다는 것인데 진위를 가릴 길은 없다. 노산군이 운명하자, 권상궁 등 그를 주위에서 모시던 궁녀들이 ‘금강정’ 이란 곳에서 벽수(碧水) 를 향해 몸을 던져 산화하였다. 낙화암은 부여에 만 있는 것이 아니라 영월에도 있는 것이다. 영월 의 청령포! 이곳은 천추의 한이 서린 슬프디 슬픈 비사(悲史)의 현장이다. • 수상 67
RkJQdWJsaXNoZXIy ODExNjY=