피고인이 자기 동네 초입을 들어선지 1, 2분쯤 지났을까, 어떤 집의 샛문이 반쯤 열 려 있었다. 그는 무엇에 빨려든 것처럼 무작정 그 안으로 들어갔다. 마침 그 집 가장은 생활비를 벌기 위해 새벽 인력시장에 나갔고 그의 처와 젖먹이 아이가 큰 방에서, 10 살과 9살짜리 딸이 그 옆방에서 잠자고 있었다. 피고인은 현관 입구의 건조대에 널려 있는 소아용 내의를 걷어 얼굴을 가린 뒤 주방에서 식칼과 투명테이프를 찾아들고 방으로 들어가 여자가 덮고 있던 이불을 걷고 칼을 겨눴다. 여자가 잠에서 깨어 나 놀란 목소리로 “우린 돈이 없어요.”라고 울먹였다. 피고인은 칼로 위협하며 “정말 돈이 없어?”라고 겁을 준 뒤 이불을 걷고 여자의 배에 올라타 팬티를 벗겨 내렸다. 그때였다. 옆문이 스르륵 열렸다. 안방의 소란에 놀라 잠에서 깨어난 옆방의 딸들이 문을 열어젖힌 것이다. 큰 딸이 “아저씨, 누구세요?”라고 물었다. 곁에 있던 작은 딸은 “아저씨, 왜 쇼 하세요?”라고 힐난했다. 피고인 은 딸들의 출현에 놀라서 하던 동작을 멈추고 슬금슬금 그 방에서 물러나와 도망을 쳤다. 이상이 수사기록과 공판기록에 적힌 사건의 전체 개요였다. 법원은 검찰의 공소내용을 그대로 인정하여 피 고인에게 ‘성폭력범죄의 처벌 및 피해자보호 등에 관한 법률 위반(특수강도강간 등)’이라는 비교적 긴 죄명을 인정하여 징역 3년을 선고했다. 피해자 진술 오락가락, 지문 없는 흉기 등 증거도 부족해 K는 1심 기록을 처음부터 끝까지 몇 번에 걸쳐 읽었지만 판결에 명시해 놓은 증거는 피해자인 여자와 그 딸 들의 진술 외에 국과수의 감정결과 피고인의 지문이 나오지 않은 식칼과 투명테이프가 전부였다. 성폭력죄나 강 도죄의 실행의 착수는 폭행, 협박을 시작할 때이므로 공소장이나 판결이유만 가지고 본다면 강도강간죄(미수)를 벗어나기는 힘들 것 같았다. 그럼에도 증거가 시원찮은 데다 결과에 비해 너무 중형이 선고되지 않았나 싶었다. K는 수사와 공판기록에서 피해자인 여자의 진술이 자꾸 바뀌는 과정을 유심히 살폈다. 이 사건의 가장 핵심 인 증거가 바로 피해자의 진술인데 경찰의 1차 신문조서에는 여자가 “우린 돈이 없어요.”라며 울먹였을 때 피 고인이 “정말 돈이 없어?”라고 하지 않고 ‘그 말에는 별로 신경을 쓰지 않는 것 같았다.’고 적혀 있었다. 피해자 에게 칼을 겨누며 “정말 돈이 없어?”라고 했다면 재물강취의 고의가 있다는 뜻이었다. 그런데 첫 진술에는 없 었던 이 말이 어떻게 2차 신문조서에는 기록된 것일까. 2차 신문은 피해자 가족이 피고인의 누나에게 합의금으 로 5,000만 원을 요구하던 무렵에 있었다. 또 하나 이상한 것은 피해자는 피고인이 칼을 겨누고 투명테이프를 뜯어 자기의 입을 막으려 했다고 진술했 다가 감식결과 칼과 테이프에서 지문을 찾아내지 못하자 이번에는 당시 피고인이 면장갑을 꼈다고 진술을 바 꿨다. 면장갑을 낀 채 투명테이프를 어떻게 벗겼다는 것인가. 뿐만 아니라 검찰송치 후에는, “돈을 주지 않으면 아이들을 가만두지 않겠다.”라고 위협했다는 말이 추가됐다. 왜 처음부터 그렇게 말하지 않았느냐니까 보복이 두려웠다고 했다. 더 나아가서 법원의 증인신문에서 피해자는 “칼끝으로 목을 겨눈 채 돈을 요구했다.”거나 자 신의 큰 딸이 “엄마, 아저씨가 엄마 목에 칼도 들이밀고, 팬티도 내렸잖아. 팬티가 이만큼 내려왔잖아.”라는 노 골적인 진술이 또 추가되었다. 피고인이 술 친구와 헤어질 때에는 만취상태였으나 얼마동안 바깥바람을 쐰 뒤 범행을 시작했을 때에는 긴 법무사 K의 현장실화 ‘사건과 판결’ 49
RkJQdWJsaXNoZXIy ODExNjY=