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3 법무사 2월호

식의 본질을 존중하지 않은 채 「나병 예방에 관한 법」 을제정해 강제격리 정책을추진했던 것이다. 게다가 1943년(소화 18년)에는 미국에서 ‘프로민’ 이라고 하는 한센병 특효약이 개발되어 1949년(소 화 24년)부터 일본에서도 한센병 환자들에게 널리 사 용되었다. 이 이후 한센병은 더 이상 불치병이 아니 라 치료 가능한 병이 되어, 구미를 중심으로 하는 각 국에서 ‘강제격리는 필요 없고 재택의료에 의해야 한 다’는 한층 더 발전된 개방외래 치료정책’이 추진되기 시작했다. 그러나 일본 정부는 1931년(소화 6년) 「나 병예방법」 제정 이후, 여러 차례에 걸쳐 여러 국가로 부터 강제낙태나 단종을 포함한 강제격리 정책을 파 기하라는 요청을 받았음에도 불구하고 이 정책을 계 속유지해 나갔다. 일본에서 한센병 문제가 비극적인 것은 이러한 국 가의 차별정책에 국한되는 것이 아니라, 전국의 지 자체까지 조직적으로 동원된 ‘나병 없는 현 만들기 운 동’의 전개로, 평범한시민들이 한센병 환자를마을에 서 몰아내는 차별을 행했던 때문이다. 「나병예방법」 이라고 하는 이 비인도적인 법률은, 놀랍게도 1996 년(헤세이 8년)까지 유지되었다. 나라와 시민에 의한 소름끼치는 차별이 아무런 근거도 없이 행해져 지금 까지도 여전히 뿌리 깊게 남아 있는 것이다. 2. 애락원(愛樂園)에 행해진 사회적 차별들 여기서는 필자가 한센병 요양소인 애락원을 방문 했을 때의 체험에 대해 말하고자 한다. 애락원은 오 키나와 나고시의 낙도에 있는데, 처음 방문했을 당시 에는 높은 담과 작은 언덕, 잡목림에 둘러싸여 천연 의 감옥과 같은 지형이었다. 전국에 있는 모든 한센 병 요양소가 이곳처럼 탈출하기 어려운 구조로 설계 되어 있다고한다. 요양소 내부는 마치 작은 나라와 같았다. 병원과 식당은 물론, 슈퍼마켓이나 갖가지 종교시설도 그 안 에 있었다. 그런데 왠지 이런 시설들은 환자들이 요 양원 밖으로 나가는 일 따위는 결코 허용되지 않는다 는 슬픈 현실을 증명하고 있는 것 같아 착잡한 기분 이 들었다. 그 중에서도 특히 인상적이었던 것은 납 골당의 존재였다. 원래는 치료시설이어야 할 요양소 에 왜 납골당이 있는 것인가를 생각해 주시기 바란 다. 이는 한센병 환자가 죽어서까지도 사회 구성원 으로 받아들여지지 않는다는 섬똑한 차별의 진실을 말해주는것에 다름아니기 때문이다. 이 납골당에는 더 기막힌 에피소드도 있다. 납골당 의 골호(骨壅, 화장한 뼈를 담는 항아리) 안에는 작은 산호가 들어가 있는 것이 있는데, 낙태와 단종이 행 해지던 요양소에서 임신한 여성 환자들이 낙태를 당 한 후, 사체가 없는 아이를 대신해 흰 산호를 골호에 넣었던 것이다. 흰 산호는 단단하고 작기 때문에 뼈 와 비슷했다. 골호 안에 들어가 있는 이 작은 산호는 세상에 태어나 나올 수 없었던 작은 생명들이 어떻게 든 이 세상에 혼적을 남기고 싶다는 마음으로 꽉 차 있는 것처럼 느껴졌다. 필자는 이같은 비인도적인 행 위와 그 안타까운 마음을 알게 되어 깊은 분노와 슬 픔에 빠졌다. 더욱 안타까운 것은, 전쟁 중에 애락원이 격 렬한 포격을 당했으며, 포격을 피하기 위해 설치한 방공호 도 애락원 입소 환자들이 직접 자신의 ‘손’으로 파낸 것이라는 사실이다. 한센병은 말초신경에 침범되는 병으로, 부상을 입어도 통증을 느끼지 않아 발견이 늦어지는 위험성이 있다. 오키나와 전쟁 중 애락원에 는 충분한 물자가 주어지지 않았고, 약을 쓰기도 힘 든 상황에서 방공호를 파느라 부상을 당해도 치료를 제대로 받지 못해 손가락을 절단해야 하는 일이 많았 다고 한다. 그래서 지금 애락원의 환자들 중에는 손 가락이 없는분이 적지 않다. 이런 극단적인 상황은 많은 입소자들의 생명을 앗 아갔다. 방공호 안에서 웅크리고 자다가 다음날에 숨 4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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