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3 법무사 3월호

71 어쩌다가 볼 수 있는 장면이지만 햇빛이 쏟아지는 어느 한낮에 느닷없는 폭우가 창대가 되어 쏟아지는 장면은 보는 이로 하여금 감동으로 몰아넣는다. 아마 창세기의 하느님께서 천지창조의 역사를 하시는 장면 이 그와 같지 않을까 엉뚱한 생각을 해보기도 한다. 초우(草雨), “한닷새나왔으면좋았지” 이렇게 비오는 날이면 꼭 생각나는 영화가 있다. 대학교 3학년이었던 1962년 초여름에 보았던, 문희 와 신성일이 주연하고 정진우가 감독한 「초우」다. 여 기서 ‘초’는 ‘처음 초’의 ‘初’가 아니고 ‘풀 초’의 ‘草’인 데, 왜 ‘初雨’가 아니고 ‘草雨’냐에 대해서는 약간의 설 명이 필요하다. 영화에서 문희는 집주인이 외국에 대사(大使)로 나 가 있는 어느 고급주택의 가정부다. 한편, 신성일은 자동차서비스 공장의 공원(工員)인데 어찌 어찌하여 두 사람이 사귀게 된다. 그런데 둘은 각자 자기 신분 에 대해 거짓말을 한다. 즉, 문희는 대사의 딸로, 신 성일은 서비스 공장의 사장으로 신분을 속인 채 사귀 는 것이다. 문희에게는 마침 예쁜 색깔의 우산 하나가 있었는 데, 그 우산은 대사가 외국에서 귀국하면서 선물로 준 것이다. 문희는 그 예쁜 우산을 쓴 모습을 애인인 신성일에게 보여주고 싶어 비 오는 날을 기다린다. 그리하여 마침내 비가 오던 날, 두 사람은 문희의 우 산 속에서 포옹하다시피 몸을 맞대고 거리를 걷는다. 아하! 그러다 저만치에서 걸어오는 대사의 딸과 마주 치게 되고 곧 문희의 신분은 들통이 나는데, 문희의 신분을 이용해 출세를 꿈꾸던 선성일은 그녀를 떠나 고 만다는, 참으로 애달픈 내용의 영화다. 여기에 ‘풀 초’의 ‘草’가 쓰여지는 이유가 있다. 풀 잎처럼 순수했어야 할 그들의 사랑이 본래의 신분을 숨긴 채 상대방을 대하는 거짓 사랑으로 인해 결국 파국으로 갈 수밖에 없음을 시사(示唆)하는 것으로, 풀잎처럼 고귀한 참사랑의 가치를 알리고자 했던 것 이다. 영화의 주제가도 제목이 ‘초우’인데 원래는 문주란 이 불렀으나 나중에 패티 킴과 정훈희까지 부를 정도 로 대단한 인기를 얻었다. 영화도 그 예술성과 함께 상업성도 풍부해 대단한 성공을 거두었고, 주연을 맡 았던 문희는 일약 스타의 반열에 오르기도 하였다. 이 영화는 당시 대한극장, 국도극장 등과 함께 일 류극장으로 이름 높았던 광화문 사거리의 ‘국제극장’ 에서 개봉되었는데 지금도 기억이 생생한 것은 극장 표를 사려는 인파로 극장 앞 광장이 꽉 매워져 있었 고, 나는 학교도 가지 않고 조조부터 영화를 보기 시 작해 내리 3회까지 보고서야 밖으로 나온 기록을 가 지고 있다. 참으로 아름다운 추억 속의 이야기이다. 밖에서는 지금도 비가 오고 있다. 오는 비는 계속 오겠지만 “한 닷새나 왔으면 좋았지”라는 소월의 시 가 생각난다. 소월은 왜 “한 닷새나 왔으면 좋았지” 라고 했을까. 너무 많이 오지는 말고 닷새 정도만 오 라는 것일까, 아니면 이제까지 몹시 가물었으니 기왕 오려면 최소한 한 닷새는 와야 된다는 것일까. 아하! 참으로 오랜만에 내리는 비야! 한 닷새만 오 되 조용히 왔다가 조용히 가거라. 그리하여 메말랐던 대지를 넉넉하게 적셔주고 나의 가슴에는 새벽의 옹 달샘이 솟게 하라. 그러나 서울 비 중에서도 내가 좋아하는 비가 있다. 도심의 한복판에 있는 고층빌딩 사이로 내리는 비다. 고층빌딩의 최고층에서 바라볼 때 하늘에서 쏟아지는 장대같은 비가 땅으로 내리꽃히는 장면과 땅에서 바라볼 때 저 높은 하늘에서 빌딩 사이로 내리꽃히는 비는 비의 숲(雨林)을이루는장관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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