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3 법무사 4월호
71 완으로부터 등을 돌려 세에게로 향한 후다. 깊은 슬픔의 종착역 이쯤해서 나는 이 불안한 트라이앵글의 불협화음 에 어떤 식으로든 화해가 깃들기를 바랐다. 그러나 완 으로부터 은서에게, 은서로부터 세에게 흐르던 사랑의 물줄기는 더 이상 흐르지 않는다. 대신 새로운 여자인 채연에게 세의 사랑의 물줄기가 흘러들어 고이기 시작 했다. 세는 사디스트가 되어 일부러 은서를 학대하고 은서로부터 멀어지려고 몸부림을 쳤다. 이제 은서에게 완도 설레며 기다리는 사랑이 아니 었다. 동생 이수도 군에 입대하여 은서의 곁을 떠났다. 여린 연둣빛 나뭇잎이었던 은서의 정신은 황폐해질 대 로 황폐해져 버렸고 몸은 거식증으로 균형을 잃었다. 커튼을 젖히자 멀리서부터 천천히 새벽이 다가오고 있었다. 마치 오랫동안 기다리고 있었다는 듯 서늘한 내 이마를 쳤다. 담배를 빼어 물고 밤새워 달려온 ‘깊 은 슬픔’의 종착역을 생각한다. 완도, 세도, 이수도, 화 연도 떠나버린 지금 은서가 걸어갈 수 있는 길은 어디 인가. 종착역은 불을 보듯 뻔한데 목이 메어 온다. 이 미 비틀어진 정삼각형의 결말을 읽는 고통을 감내하 기가 힘들고 가슴이 아프다. 에필로그의 책장을 넘기 면 슬픈 사랑의 변주곡도 지휘자의 피날레 동작과 함 께 끝이 날 것이다. 나는 앞으로 나아가기가 두려웠다. 피할 수만 있다면 이 시점에서 ‘깊은 슬픔’에 마침표를 찍고 싶었다. 그러나 나는 감동적인 피날레의 유혹을 이기지 못 하고 내 자신을 배반하고야 말았다. 기어이 에필로그 첫 장을 넘기자마자 ‘퉁’하는 소리가 둔탁하게 들렸다. 불안하던 가야금의 현이 끊어져 버린 것이다. ‘조용하 다’는 표현보다는 ‘그윽하다’는 말이 더 적합한 한 여인 의 사랑이 이슬어지 쪽으로 머리를 두고 “6층 아파트 에서 가벼이 몸을 날렸다.” 담배에 불을 붙이며 나는 이 충격으로부터 벗어나 기 위해 커튼을 닫았다. 누가 은서를 우리들에게서 빼 앗아 갔는가. 책장을 덮은 후에도 은서는 비록 꽃잎처 럼 흩날려 스러져 갔지만, 그러나 진정코 우리들 마음 속을 떠나지 않았다는 생각을 지울 수 없었다. 은서의 ‘깊은 슬픔’은 완의 가슴에도, 세의 마음에도, 우리들 의 앙상한 가지에도 봄빛처럼 피어나 꽃물을 들이고 있었다. 이제 은서가 남긴 마지막 말로써 나는 잔잔하고 그 윽했던 한 사랑을 기리는 묘비명을 세우고자 한다. 나, 그들을 만나 불행했다 그러나 그 불행으로 그 시절을 견뎠다 커튼을 젖히자 멀리서부터 천천히 새벽이 다가오고 있었다. 마치 오랫동안 기다리고 있었다는 듯 서늘한 내 이마를 쳤다. 담배를 빼어 물고 밤새워 달려온 ‘깊은 슬픔’의 종착역을 생각한다. 완도, 세도, 이수도, 화연도 떠나버린 지금 은서가 걸어갈 수 있는 길은 어디인가. 종착역은 불을 보듯 뻔한데 목이 메어 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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