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3 법무사 6월호

4) “手不釋卷” 5) “大弟但有武略耳, 至於今者學識英博, 非復吳下阿蒙” 6) “士別三日, 卽當 刮目相待” 부사마(別部司馬)가 되었다. 208년에 오(吳)의 군주(君主) 손권(孫權, 182~ 252)이 자기 아버지 손견(孫堅)을 죽인 황조(黃祖) 를 정벌할 때에, 여몽은 선봉대를 통솔하여 직접 황 조의 도독 진취(陳就)의 목을 벴고, 성을 버리고 달 아난 황조를 병사들이 뒤쫓아 가서 붙잡았다. 이에 손권은 “이번 전쟁의 승리는 먼저 진취를 사 로잡은 데서 비롯되었다.”고 말하고 여몽을 ‘횡야중 랑장(橫野中郞將)’으로 삼고 1,000만 전(錢)을 하사 했다. 손권( 孫權 )의 권학( 勸學 ) 손권이 여몽과 장흠(蔣欽)에게 “그대들은 이제 고 위관리가 되었으니 마땅히 책을 더 많이 읽어야 하 오.”라고 말하자, 여몽이 “군중(軍中)의 일이 바쁜 상황에서 언제 책을 읽겠습니까?”라고 대꾸했다. 그러자 손권은 “내가 그대들에게 학문을 하라는 것이 설마 박사가 되라고 그러는 것이겠소? 그저 얼 마간의 역사만 이해하면 되지 않겠소? 그대들이 아 무리 일이 많다고 해도 설마 나보다 바쁘다는 말이 오? 광무제(光武帝, B.C.6~A.D.57)는 일찍이 군무 (軍務)로 바쁠 때에도 손에서 책을 놓지 않았고, 4) 맹 덕(孟德, 曹操의 字)도 늙었으나 열심히 배우고 있다 고 하오. 그대들은 어찌하여 스스로 힘써 배우려 하 지 않소?”라고 힐책했다. 여몽은 이때부터 배우려는 뜻을 굳게 가지고 부지 런히 노력한 결과 나중에는 그 숱한 유생들보다 더 많은 책을 읽어 삼국(三國) 정립(鼎立) 당시의 정세 (情勢)를 판단하는 안목(眼目)이 탁월(卓越)해졌다. 노숙( 盧肅 )의 경탄( 驚歎 ) 208년 벌어진 적벽대전(赤壁大戰)에서 조조(曹 操)를 크게 깨뜨린 영웅 주유(周瑜)가 210년에 죽 자, 그를 대행한 노숙(盧肅, 172~217)이 육구(陸 口)로 가는 길에 여몽의 군영에서 만날 때에도 마음 속으로는 여전히 여몽을 경시(輕視)하고 있었다. 그런데 형주(荊州)를 굳게 지키고 있는 촉한(蜀 漢)의 관우(關羽, ?~219)에 대처(對處)할 방략을 여 몽으로부터 듣고는, 그의 등을 치면서 “나는 그대가 단지 무략(武略)만 있는 줄 알았더니, 이제 보니 학 식이 어찌나 뛰어나고 넓은지, 그 옛날의 여몽이 아 니구려.” 5) 라고 경탄하자, 여몽이 말하기를 “선비는 헤어진 지 사흘이 되면 눈을 비비고 상대방을 대접 해야 마땅한 것이 아니겠소.” 6) 라고 대답했다. 그 뒤 노숙이 세상을 떠나자, 여몽이 그를 대행하 여 육구에 주둔했으며, 노숙의 군대 1만 여 인마(人 馬)는 다 여몽에게 귀속되었다. 여몽이 육구에 주둔하면서 형주(荊州)를 빼앗기 위하여 관우와 겉으로는 두터운 정의(情誼)를 다지 고 우호 관계를 맺었는데, 뒤에 관우가 번성을 토벌 하러 가면서 병사를 남겨 공안(公安)과 남군(南郡) 을 지키게 하자, 병을 핑계로 사임을 하고 자기 후임 으로 젊은 육손(陸遜, 183~245)을 추천하여 관우 를 방심하게 만든 다음, 주도면밀한 계책을 세워 2 년 후인 219년에 마침내 관우를 사로잡고 오(吳)나 라의 숙원이었던 형주(荊州)를 평정하였다. 7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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