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3 법무사 6월호
72 『 』 2013년 6월호 수상 중학생이겪었던 ‘6·25 피란생활’ 민 영 규 ■ 법무사(인천회) 북한군에점령된피란처, 학교서도사상교육 1950년 북한의 6·25 남침으로 엉겁결에 험로 한 가운데로 내팽개쳐졌던 피란민들은 기약도 없고 또 그 깊이도 헤아릴 수 없는 불안과 공포에 떨어야 했 다. 청주에서 조치원 쪽으로 약 3km 남짓한 거리에 위치한 반송지서(파출소)는, 순식간에 후방이 되어 버린 서울 인근의 북한군 요새를 교란하기 위해 오르 내리던 미군 전투기의 주요 비행로였던 까닭에 미 전 투기의 공습이 하루도 거르는 날이 없었다. 하긴 그 반송지서에 내걸린 인민공화국 깃발이 시 력 좋은 미 전투기에 일찌감치 발각되어버린 탓도 있 었으리라. 필자 가족의 피란처였던 ‘용정리’는 바로 그 반송지서 안쪽 동네였다. 이곳은 미 공군기의 공 습을 피해 밤마다 백 여리 씩 진군한다던 애송이 인 민군들이 머물다 가곤 했던 곳이었다. 가끔은 김일성대학의 학생이란 처녀들도 10여 명 씩 그 대열에 묻어 왔다. 그런 북새통 속에서 세상은 빠르게 바뀌고 있었고, 우리의 미래는 어쩔 수 없이 씁쓸한 웃음으로 맞을 수밖에 없게 된 인민군들에 의 해 결정되어 가고 있었다. 당시 중학교 2학년이던 필자는 인민군 장교의 호 통에 쫓겨 공습의 위험까지 무릅쓰고 등교를 해야만 했다. 불과 보름 전까지만 해도 그토록 생기발랄했던 교정은 너무나 을씨년스러웠다. 왕성한 육질의 김일 성 사진이 압도하던 교무실에는 이미 수 십 명의 학 생들이 모여 있었다. 어처구니없게도 뒤바뀌어 버린 세상 탓인지 모두들 어리둥절한 모습들이었다. 조금 있으니 6학년 선배 한 사람이 “조국해방을 목 전에 두고 있는 이때, 우리 모두 영광스런 인민군 전 사가 되어서 조국의 어버이이신 김일성 장군께 충성 을 다하자”며 소리 높여 외쳤다. 이 갑작스럽고 황당 한 제안에 장내는 금세 숙연해졌다. 하지만 잠시 뒤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약속이라도 한 듯 “옳소, 옳소 ~!” 하고 재창이 이어졌다. 이는 분명 어린 마음에 일어난 집단적이고 충동적 인 동조현상이었지만, 누구도 감히 이를 가로막고 나 서지 못했다. 도무지 선택의 여지가 없는 이 낯설고 충동적인 분위기가 나는 내내 너무 무섭고 두려워서 오금이 저렸다. 학교를 파하고 모처럼 학교에 나온 김에 피란으로 떠나온 집에 한 번 들러 보기로 하고 교문을 나섰는데도 인민군 전사가 되겠다고 핏발을 세우던 그 생경한 장면들이 떠올라 자꾸만 다리가 후 들거렸다. 집에 도착하니 이미 전쟁으로 황폐해진 도시의 먼 지를 자욱하게 뒤집어쓴 살림살이들이 제멋대로 나 뒹굴고 있었다. 그래도 낯익은 것들이어서 그런지 살 갑기만 했다. 그런데 작은 방에 있던 책장과 사진첩 들이 이상했다. 누군가 샅샅이 뒤졌던 흔적이 역력했 는데, 아마도 거주자 성분을 캐내기 위해 인민군들이 한 짓인 모양이었다. 7월 중순으로 접어들자 이제 피란처에서도 외부인 에 대한 성분조사는 물론, 생업에 복귀하라는 지시가 떨어져 쫓겨나는 사람들이 생겨났다. 필자의 가족도 그들의 지시대로 집 근처 비탈진 곳에다 방공호를 만 들고, 밤에는 사상교육과 군가를 두 시간씩 학습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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