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3 법무사 6월호

73 전쟁의화염속에속절없이삶의터전이무너져내리는것을목격한이들의원망과한탄, 그리고 증오는그시대를살아내고있었던사람들만이알아들을수있는소리일것이다. 아픔을단련시키지 않고는 살 수가 없었던 그 험난한 세월. ‘우리의 운명은 이대로 방치되고 말 것인가?’ 질문하면서 불면으로밤을보내던그해여름도그렇게저물고있었다. 승전에 도취된 인민군들은 갈수록 이성을 잃고 애 잔할 정도로 고분고분해진 주민들을 닦달하기 시작 했다. 강제로 곡물을 할당하고 성인남자들은 모두 제 식훈련장으로 끌어냈다. 항공기와의 교신이 우려된 다며 손거울마저 금지하는 등 자질구레한 지시들도 쏟아졌다. 양심에반해살아야했던슬픈시절 필자는 아무래도 지원병으로 끌려갈 것만 같아서 등교하던 발길을 슬그머니 접었다. ‘죽음’이라는 공포 와 불안을 늘 달고 사는 것은 필자의 사정만은 아니 었다. 공포를 넘어선 그 많은 체념의 눈동자들, 채찍 에 먼저 투항해 버리고 양심이 따르지 않는 행동마저 주저할 수 없었던 가련한 사람들. 인민군들은 억지 사상교육을 통해 주민들의 눈과 입을 적대적 원리로 무장시키고, 끝내는 자신들의 편 에 설 수밖에 없도록 만들었다. 그렇게 길들여진 우리 는 인민군들을 진정한 아군으로 착각했고, 허구를 넘 어 왜곡된 시선으로 세상을 인식했다. 그처럼 시대를 수청 들며 살아갈 수밖에 없었던 슬픈 시절이었다. 사실 변변한 총 한 자루 가지지 못했던 국군에 비 해 다발총 등으로 무장한 인민군의 화기는 월등했다. 주력화기였던 탱크 역시 소련제라는 인민군 탱크 외 에는 목격한 사실이 없었다. 전쟁 발발 나흘째던가, 아저씨 댁 가족과 함께 대전 쪽을 향해 피란하면서 우리 가족은 이름 모를 어느 산등성이를 헤매고 있었 다. 그런데 마침 그곳에 잠복 중이던 국군병사 세 사 람이 불쑥 나타나 “더 이상 남하할 수 없다”고 제지를 하는 것이다. 보아 하니 이들 세 명 중 두 명은 맨손이었고, 천으 로 된 모자와 운동화, 다 헤진 군복을 입고 있는 행색 이 걸인과 조금도 다를 바가 없었다. 그 일이 있은 지 며칠 후, 파죽지세로 남하하던 전선은 우리가 피란가 기 위해 헤매던 바로 그 산기슭을 훨씬 지난 지점에서 이제는 대전을 탈환하기 위해 화염을 내뿜고 있었다. 이런 광경은 우리 가족이 6·25 발발 이래 최초로 실감하게 된 전쟁장면이기도 했다. 전쟁의 화염 속에 속절없이 삶의 터전이 무너져 내리는 것을 목격한 이 들의 원망과 한탄, 그리고 증오는 그 시대를 살아내고 있었던 사람들만이 알아들을 수 있는 소리일 것이다. 아픔을 단련시키지 않고는 살 수가 없었던 그 험 난한 세월. ‘우리의 운명은 이대로 방치되고 말 것인 가?’ 질문하면서 불면으로 밤을 보내던 그 해 여름도 그렇게 저물고 있었다. 속절없는 분노와 좌절로 인한 인내가 바닥날 즈음, 청주 경찰서와 시청건물이 화염에 휩싸였다는 은밀 한 소문이 나돌았다. 아니, 전쟁이 다시 이곳으로 몰 려오고 있단 말인가? 하지만 현실은 전쟁이 아니라 해방이었다. 그날 오 후 미군 장갑차가 마을 어귀까지 들이닥친 것이다. 그 사건은 공포에서 해방되는 감격적인 일이었건만, 모두들 그저 어리둥절할 뿐이었다. 미군에 쫓겨 철수한 북한군이 머물다간 자리에는, 풀 한포기보이지않았고한결같이초토화되어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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