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전의 향기 ▶ 고사성어(故事成語) 이야기(10) 운주유악 (運籌帷幄) 1) 「夫運籌策帷幄之中, 決勝於千里之外, 吾不如子房.」 2) 김원중 옮김 「사기 세가」 p. 825~853, 노만수 옮김 「사기 영선」 p. 79~102, 신 동준 편역 「실록 초한지」 p. 49~358 3) “韓人張良, 父祖以上, 五世相韓, 韓亡, 良, 欲爲韓報仇.” “운주유악(運籌帷幄)”이란 “군대(軍隊)의 막사(幕舍) 안에서 전략(戰略)을 세운다”는 뜻으로 ’ 중국의 한왕(漢王) 유방(劉邦)이 B.C. 202年에 서초패왕(西楚覇王) 항우(項羽)를 깨뜨리고 황제(皇帝)로 즉위한 뒤에 낙양(洛陽)의 남궁(南宮)에서 신하들에게 주연(酒宴) 을 베풀 때 천하를 차지하게 된 연유를 밝히면서 ’ “무릇 군대의 막사 안에서 전략을 세워 천리 밖의 승부를 결정하는 일은 내가 자방(子房)만 못하오.”1)라고 한 데서 유래한 말입니 다. 『사기』 「유후세가(留侯世家)」 등에 나오는 내용을 요약하면 다음과 같습니다.2) 장량(張良)의 치열(熾烈)한 복수심(復讐心) 유후(留侯) 장량(張良 : ? ~B.C.189)은 자(字)가 자방(子房)으로 그의 조상이 한(韓)나라 사람이다. 조부(祖父) 희개지(姬開地)와 아버지 희평(姬平)이 무려 5대(代)에 걸쳐 한(韓)나라의 상국(相國)을 지냈다.3) 진(秦)나라가 B.C. 230년에 戰國七雄中 제일 먼저 한(韓)나라를 멸망시켰을 때에 장량은 나이가 어려서 벼슬을 하지는 않았다. 그 당시에 그의 집에는 노복(奴僕)이 삼백 명이나 되었는데 ’ 동생이 죽었을 때 장례를 치르기는커녕 모든 가산(家 産)을 다 털어 진시황(秦始皇)을 죽일 자객을 구해서 한(韓)나라의 원수를 갚고자 하였다. 장량은 일찍이 동쪽으로 가서 창해군(倉海君)을 만나 뵙고 ’ 역사(力士)를 얻은 뒤에 무게가 120근(斤)이나 되는 큰 철추(鐵椎)를 만들어 B.C. 218년 진시황이 동방을 순수(巡狩)할 때 ’ 역사(力士)로 하여금 박랑사(博浪沙 : 현재 하남 성 原陽縣 부근)에서 진시황을 공격하였으나 잘못하여 부거(副車 : 시종이 타는 수레)를 맞히고 말았다. 진시황은 크게 놀라서 천하를 모두 샅샅이 뒤져 급히 자객들을 붙잡자 ’ 장량은 성(“姬”를 “張”으로 바꿈)과 이름 을 바꾸고 하비(下邳)로 달아나 숨어 살면서 황석공(黃石公)으로부터 「태공병법(太公兵法)」을 받아 열심히 익히고 외워 마침내 왕자(王者)의 스승이 되는 길을 터득(攄得)하였다. 장량의 헌책(獻策)과 유방(劉邦)의 청종(聽從) 십년이 지나 진승(陳勝) 등이 병사를 일으켜 진(秦)나라에 모반하자 ’ B.C. 208년 장량도 젊은이 100여 명을 모아 진 영 환 ■ 법무사(서울동부회) · 대한법무사협회 감사 62 『 』 2013년 9월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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