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현(留縣)에서 패공(沛公) 유방(劉邦)을 만났고 ’ 패공은 장량을 구장(廐將 : 말을 담당하는 책임자)으로 임명했다. 장량이 자주 「태공병법」을 패공에게 설명(說明)하자 패공이 좋게 여겨 항상 그의 계책을 채용했다. 장량이 전에 다 른 사람에게 「태공병법」을 말했을 때는 아무도 이를 이해하지 못한 반면 ’ 유방이 자신의 계책을 좇는 것을 보고는 크게 탄복하면서 다음과 같이 말했다. “패공은 대략 천수(天授 : 하늘이 세상에 내려 준 인물)에 해당한다.” B.C. 207년에 초(楚) 회왕(懷王)의 명으로 패공이 진(秦)나라를 치기 위해서 참모인 장량과 함께 낙양(洛陽)에서 남쪽으로 내려가 완현(宛縣)을 공략하고 서쪽으로 무관(武關 : 현재의 섬서성 丹鳳縣 동남쪽)에 들어갔다. 이때 패 공이 병사 2만 명으로 진(秦)나라의 요관(嶢關)을 지키는 군대를 치려고 하자 장량이 설득하여 말했다. “진나라 군대는 여전히 강성하여 가볍게 볼 수가 없습니다. 제가 듣기로는 그들의 장수는 백정(白丁 : 도축업자) 의 자식이라고 하니 ’ 장사꾼은 돈이나 재물로 손쉽게 움직일 수 있습니다. 패공께서는 잠시 성벽에 머물러 계시고 ’ 사람을 보내 먼저 가서 5만 명의 식량을 준비하고 ’ 다시 모든 산 위에 많은 깃발을 세워 의병(疑兵 : 군사가 있는 것 처럼 가장함)으로 삼게 하시고 ’ 세객(說客) 역이기(酈食其)와 육가(陸賈)에게 많은 보물을 주어 진나라 장수를 매수 (買收)하십시오.” 진나라 장수가 매수되어 진나라를 배반하고 패공과 화친을 하고자 하거늘 패공이 기쁜 나머지 얼른 함양으로 진 격하자고 재촉했을 때에 장량이 반대했다. “이는 단지 그 진나라 장수가 배반한 것일 뿐이지 ’ 병졸들이 따르지 않을까 두렵습니다. 따르지 않으면 반드시 위 험하게 되니 ’ 그들의 군기(軍氣)가 느슨해진 틈을 타서 공격하는 것이 좋겠습니다.” 패공이 이에 군사를 이끌고 요관을 우회해 괴산을 넘어간 뒤 방심하고 있던 진나라 군대를 공격하여 크게 쳐부수 었다. 그들을 쫓아 북쪽으로 남전(藍田)에 이르러 다시 싸우니 진나라 군대는 결국 대패하고 말았다. B.C. 206년에 드디어 진(秦) 나라 수도인 함양(咸陽)에 이르니 진나라 3세 왕 자영(子嬰)이 패공에게 항복했다. 패공은 진나라 궁으로 들어가자 궁실 휘장이나 개와 말 ’ 보물 ’ 여자 등이 수천을 헤아릴 정도로 많아 마음속으로 그 곳에 살고 싶어 했다. 번쾌(樊噲:?~ B.C. 189)가 패공에게 궁 밖으로 나가 살도록 간언하였으나 패공이 듣지 않자 ’ 장량이 말했다. “진(秦)나라가 무도한 탓에 패공께서 여기에 이를 수 있었던 것입니다. 무릇 천하를 위하여 남아 있는 적을 없애 려면 마땅히 검소함을 근본으로 삼아야 합니다. 지금 비로소 진나라에 들어왔다고 그 즐거움을 편안하게 누리기만 한다면 ’ 이는 이른바 ‘하(夏)나라의 폭군 걸(桀)왕이 포악한 짓을 하도록 돕는 것’4)이나 마찬가지입니다. 또 ‘충성스 러운 말은 귀에 거슬리지만 실천하면 이롭고 ’ 독한 약은 입에 쓰지만 병을 고치는데 이롭다’5)고 하였습니다. 패공 께서 번쾌의 말에 따르기를 원합니다.” 패공은 이에 패상(覇上 : 섬서성 서안시 동남쪽)으로 군대를 돌렸다. 그 후에도 장량은 여러 가지 계책으로 유방을 도와서 천하를 재통일하는데 큰 공을 세워 유후(留侯)에 봉해졌으 나 ’ 부귀영화를 하찮게 여겨 끝까지 명철보신(明哲保身)을 하였으니 참으로 현명(賢明)했던 사람이 아닌지요? 63 4) “助桀爲虐 ” 5) “忠言逆耳利於行, 毒藥苦口利於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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