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3 법무사 10월호

지금 폐하께서는 풍(豊) · 패(沛)에서 일어나 촉(蜀) · 한(漢)을 석권하고, 삼진(三秦)을 평정한 뒤에 항우(項羽)와 형양(滎陽) · 성고(成皐)사이에서 큰 싸움을 70회, 작은 싸움을 40회나 치렀습니다. 이로 인해 살상된 백성들의 간 (肝)과 뇌(腦)가 땅을 덮고, 아비와 자식의 뼈가 함께 들판에 버려진 것이 이루 헤아릴 수 없이 많았습니다. 통곡과 흐느끼는 소리가 아직도 끊이지 않았고, 부상당한 사람은 지금도 일어나지 못하고 있는 형편입니다. 그런데도 불구 하고 폐하는 주나라 전성기인 성왕(成王) · 강왕(康王)의 시대와 번영을 겨루려 하여 낙양에 도읍을 정하셨는데, 신 (臣)은 온당치 않은 일인 줄로 생각합니다. 한편, 진(秦)나라 지역은 산에 싸여 있고 황하(黃河)를 띠로 두르고 있어 사방이 더없이 여물게 막혀 있습니다. 갑 자기 위급한 사태에 직면하더라도 백만(百萬) 대군을 즉시 모아 충분히 지킬 수 있습니다. 진나라의 옛 서울을 차지 하여 기름진 땅을 바탕으로 삼게 되면, 이것이야 말로 이른바 ‘천부(天府 : 하늘이 내린 창고)’라고 하는 것입니다. 폐하께서 관중으로 들어가셔서 그곳을 도읍으로 정하면, 산동(山東 : 殽山의 동쪽) 땅이 비록 어지러워지더라도, 진나라의 옛 땅만은 고스란히 그대로 보전할 수 있습니다. 사람이 서로 싸울 때 상대방의 목을 조르고 그의 등을 치 기 전에는 완전한 승리를 거둘 수는 없습니다. 지금 폐하께서 관중에 도읍하시고 진나라의 옛 땅을 차지하게 되시 면, 천하의 목을 조르고 그 등을 치게 된다고 말할 수 있을 것입니다.” 황제가 이에 대해 여러 신하들의 의견을 묻자, 신하들은 모두 산동(山東) 출신이었으므로 다 같이 반대 의견을 말 했다. “낙양에 도읍한 주나라는 수백 년 동안 왕 노릇을 계속했으나, (관중에 도읍한) 진나라는 겨우 2세(二世)만에 망 했습니다. 낙양은 동쪽으로 성고가 있고, 서쪽으로 효산과 면지(澠池)가 있으며, 황하를 등지고 이수(伊水)와 낙수 (洛水)를 마주보고 있어 그 견고함이 족(足)히 믿을 만합니다.” 장량(張良)의 찬성(贊成)과 유방(劉邦)의 과단(果斷) 대다수의 신하들이 반대하므로, 황제가 장량에게 의견을 묻자, 장량이 대답했다. “낙양이 비록 이처럼 험고(險固)하기는 하나 중심부는 극히 협소해 수 백리에 불과하고 전지(田地) 또한 척박하 며, 사방에서 적의 공격을 받을 수 있는 곳이므로 용무(用武 : 用兵)할 수 없는 곳입니다. 그러나 관중은 왼쪽으로 효 산과 함곡관이 있고 오른쪽으로 농(隴) · 촉(蜀)이 있으며 기름진 들판이 천리(千里)나 됩니다. 남쪽으로 파(巴 : 현 재의 중경시) · 촉의 풍요가 있고, 북쪽으로는 호원(胡苑 : 흉노 초원의 畜牧)의 이익을 취할 수 있습니다. 삼면(三面)이 험조(險阻 : 굳게 막힘)하여 쉽게 수비할 수 있고, 오직 동쪽으로 제후를 제어하기만 하면 됩니다. 제후가 안정되면 황하와 위수(渭水)를 통해 천하의 곡식을 조운(漕運)하여 서쪽으로 경사(京師 : 首都)에 공급할 수 있습니다. 만약 제후들이 변란을 일으키면 강물을 따라 내려가며 군대와 군수물자를 수송할 수 있습니다. 이것이 이른바 금 성천리(金城千里)요, 천부지국(天府之國)이라는 것입니다. 유경의 말이 옳습니다.” 황제 유방이 즉일(卽日 : 當日)로 거가(車駕 : 임금이 타는 수레)를 타고 서쪽으로 가서 관중(關中)에 도읍했고, 유 경을 낭중(郎中 : 황제의 비서)으로 임명하여 호(號)를 봉춘군(奉春君)이라 하고 유씨(劉氏) 성(姓)을 하사했다. 71 ※ 이 글로 ‘고사성어 이야기’의 연재를 마칩니다. 그동안 성원해주신 독자 여러분께 머리 숙여 감사의 말씀을 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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