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3 법무사 10월호
종 불만을 토로하셨다. 온실엔 이미 구멍이 뚫어졌 고, 엊저녁엔 그 구멍 사이로 우박도 쏟아졌다는 사 실을 손바닥으로 막으려고만 하셨다. 아버지는 자식 들에게 이해받고 싶어 하셨으나 가족들 중 누가 당 신을 이해하려 했는지는 아직 모르겠다. 그에게도 사랑하고, 꿈을 꾸던 젊은 시절이 있었다 아버지가 돌아가시기 직전의 어느 가을, 아버지 가 카세트 테이프로 「고엽」을 들으며 주무시는 모습 을 보았다. 아버지는 당뇨와 합병 증세로 고통받고 계셨다. 몸무게가 20킬로그램이나 줄었다. 나는 아 버지의 앙상한 손을 몰래 잡았다. 떨렸다. 오랜만에 만져보는 아버지의 손. 늙고 지친 손. 시간이 묻어 있는 손. 동네에 어둑어둑 어둠이 내리고 흐린 가로등이 켜질 때면 골목에서 뛰어놀던 큰아들을 아버지는 우 렁찬 목소리로 불렀다. “철우야, 저녁 먹자.” 그리고 아버지는 내 바지에 묻은 먼지를 아무 말 없이 털어주었다. 무언가 믿을 만한 것, 무언가 의 지할 만한 것은 언제나 필요한 법이다. 아버지는 어 린 내게 그런 존재였다. 아버지가 돌아가셨다. 묵묵히 이별을 고하였다. 아버지 사후에도 세상은 평온한 일상 속에서 다람쥐 쳇바퀴 돌리듯 다시 돌아갔다. 고인의 물건을 정리 하다가 장롱 뒷벽 먼지 구덩이에서 찾아낸 사진첩을 보았다. 당신이 이 세상에 다녀갔다는 흔적이 사진 속에 남아있었다. 아버지에게 젊은 시절이 있었다는 사실에 새삼 놀랐다. 그도 꿈을 꾸었고, 사랑을 했고, 그리고 슬 퍼하고 괴로워하고 기뻐했음이 사진 속 아버지의 얼 굴에 녹아 있었다. 생존을 위해 고민하며 살아왔을 것이고, 엉킨 그물 같은 삶을 풀어내기 위해 번민 속 에서 전전반측(輾輾反側)했을 것이다. 자식이 행복하길 바라고 가장으로서 가족들에게 작은 숨통이 되고자 많은 숙제를 해결해야 했을 것 이다. 교통사고 이후 생활의 현장에서 도태되며 가 부장의 권위를 급속히 상실했던 아버지는 그로 인해 많은 우울과 외로움을 몸소 견뎌야 했을 것이다. 나는 아버지가 사랑으로 나를 품어주기만 바랐던 것 같다. 그 전에 내가 두 팔 벌려 그를 먼저 사랑했 어야 했다. 나 자신 아이들의 아버지가 되고 나서야 알게 된, 때늦은 깨달음이다. 아버지 무덤 옆에 누워 듣던 「고엽」 아버지가 애지중지했던 손때 묻은 이브 몽땅의 카세트 테이프도 유품 중에서 찾아냈다. 나는 그 테 이프를 듣지 않고 한참 동안을 보관만 했다. 누군가 내게 “사랑하는 누군가와 헤어진다면 어떻게 되겠는 가?”라고 묻는다면 나는 이렇게 답할 것이다. “그와 나누었던 모든 것들에서 아픔을 느낄 겁니다.” 사랑 은 그 크기만큼 아픈 것이니까. 그아픔때문에 「고엽」을들을수없었다. 일정한거 리를 두고 냉정을 찾기에는 꽤 오랜 시간이 걸렸다. 라디오에서그음악이나오면꺼버리기까지했으니. 낙엽이무수히나뒹굴어요 / 추억과미련도마찬 가지로 / 그리고 북풍은 낙엽들을 실어나르는군 요 / 망각의 싸늘한 밤에 보세요, 난 잊어버리지 않았어요 / 그대가내게들려주었던그노래를 - 「고엽」 1절 아버지가 돌아가신지 10년이란 세월이 흘렀다. 작 년 추석에서야 나는 아버지 무덤 옆에 누워 스마트폰 에 담은 이브 몽땅의 「고엽」을 아버지와 함께 들었다. 묘지에 낮게 깔린 이브 몽땅의 목소리는 인적 없는 포구의 바람소리처럼 쓸쓸했다. 옆에 있을 때 대수롭 지 않게 여겨지는 사소한 존재가 사실은 얼마나 소중 한 기쁨인가를 알아채려면 그것이 사라졌을 때의 괴 로움의 크기를 상상하면 된다. 아버지께 다짐했다. “소중한 삶을 위해 최선을 다해 늙어가고 싶습니 다. 내 앞의 생이 다하는 날까지.” 7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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