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3 법무사 10월호
했을 것이다. 그들의 만남과 헤어짐의 비극적 이야기 는 다들 아실 테고, 필자가 보기에 고흐와 고갱은 누 구보다도 서로를 흠모하면서도 같은 길을 갈 수는 없 는, 축복이자 저주인 관계였으리라. 고갱과 고흐, 현실과 이상사이에서 오로지 그림만을 그렸던, 자신을 다 태워 버리고 그 안에서 숱하게 좌절하며 자기의 류(流)를 찾았지 만 생전에 인정받지 못하고 비극적인 생애를 마친, 사후에 최고의 자리를 차지하게 된 고흐. 세속적인 관심과 성공의 길도 걸어보았고, 자신이 어떤 길을 가는지 비교적 정확하게 알고 있었고, 쾌 락과 환멸을 동시에 가져보았고, 즉물(卽物)적인 묘 사보다도 위의 층위에서의 관조를 추구한, 자신을 다 시금 변증법적으로 초월해 보고자 한 고갱. 그들은 같으면서도 다른, 양립하기 어려운 두 지 성, 아니 극적인 감성 대 지성이었을 것이다. 박제가 되어 버린 천재와, 박제되진 않았지만 높이 날아가다 가 추락한 이카루스(Icarus)의 대비라고 할까? 고갱의 정신과 화풍을 단계지어, 3기 혹은 4기로 나누기도 한다. 분명한 것은, 고흐와의 결별과 이혼 이후 종합주의를 표방하고, 타히티에서 살면서 폴리 네시아 시대의 걸작을 만들어 내기까지 그의 정신은 계속 변했고, 고흐처럼 정신질환을 앓거나 자살 기도 를 하기도 하였지만, 그는 그의 의식(意識)을 계속 의 식하고 있었다는 점이다. 필자는 이 점을 그의 특이점으로 본다. 이 점이 역 설적으로 그에게 천형(天刑)으로 작용한 것이리라. 타히티(Tahiti) 섬에서의 낭만과 순수의 시대도, 그의 이승에서의 이상향을 완전히 실현해 주지는 못했다. 그의 화풍은 피카소 등의 신미술에 크나큰 기여를 했고, 당대에 이미 미술의 조류를 개척한 공로를 인 정받은 고갱이었지만, 죽는 순간 그는 행복했을까? 자신이 극복하고자 한 것에 여전히 얽매어 있음을 자각하는 선각자의 비애, 자신도 그렇게 극복당하고 마는, 예술가의 초상에 지나지 않았음을 인식한, 영 원에 이르지는 못한 비루한 한 인간임을 받아들인 고 갱은 그 최후의 유작을 우리에게 남긴 것이 아닐까? 다분히 성서적 인간관으로 그려졌지만, 그가 담은 풍경들은 그것을 새롭게 보게 한다. ‘새롭게 보는 것’ 이 미술과 예술(둘 다 ‘art’이다.) 아니고 무엇인가? 인상주의가, 상징주의가, 표현주의가, 초현실주의가, 포스트모더니즘(post-modernism)까지 모든 이즘이 말이다. 필자가 이 글의 제목에 그 작품 제목을 인용 한 이유가 그것이다. 백 년 후에 우리 각자의 눈으로, 우리는 그가 본 세계를 어떻게 볼 것인가…. 현대화가들의 고갱재해석작품도 전시 미술관에서는 고갱의 작품만이 아닌, 현대 작가들 의 재해석적 시도도 소개했다. 필자는 그 중 임영선 의 「만다라」를 의미있게 봤고, 천경자의 작품들도 상 시 전시되어 있었다. 서울시립미술관은 우리 법무사에게는 너무도 낯익 은 곳이다. 얼마 전까지 상업등기소가 바로 그 옆에 있었으니 말이다. 이제는 중부등기소만 남았지만, 혹 여 들를 일이 있다면, 한 나절쯤 시간을 내서 전시관 을 돌아보며 사색에 빠져 보아도 좋으리라. 미술관 앞에는 자그마한 공원이 꾸며져 있어서, 도 시락을 까먹거나 가족과 기념사진을 찍는 호사도 누 릴 수 있다. 근처에는 유명한 정동극장이 있고, 전시 회를 보고 내려가면서 덕수궁 돌담길을 다시 걷는 정 취도 가져 볼 수 있다. 7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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