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3 법무사 12월호
는 영화 「복수는 나의 것」이나 「올드보이」에서와 같은 통쾌한 보복의 대리만족을 느끼게 되기도 한다. 한 여인을 한 마을 사람들 모두가 성적(性的) 노 리개로 활용(?)하며 공범관계를 지속해 왔다는 설정은 지난 2010년 흥행작 「이끼」와도 닮아 있 다. 댐으로 수몰된 마을과 살인, 복수의 내러티브 (Narrative)는 정유정의 소설 「7년의 밤」도 생각나 게 한다. ‘복수’ 라는 우리말에 대응하는 영어 단어는 쉽게 보아 ‘revenge’, ‘avenge’, ‘payback’, ‘vengeance’ 등인데, 영호의 복수는 정의의 구현이나, 받은 그대 로를 상대방에게 되돌려 준다는 의미가 아닌, 분노 의 축적을 자신만의 방법(살인)으로 털어 버린다는 점에서, 「친절한 금자씨」와 비슷한 ‘vengeance’에 가깝다고 볼 수 있을 것이다. 살해의 과정은 앙갚음이기도 하지만, 동시에 자 신의 분열된 자아를 세우는 길, 구하지 못한 어머니 와 동생(들)에 대한 속죄의 길이기도 하다. 집단을 통해 증폭되는, 개인들의 악의 평범성 작품 소개에도 나와 있듯이, 그렇다고 해서 통쾌 한 복수를 계획하고 실현하는 영호의 지능에 탄복 한다거나, 보복살해 를 통한 구원 내지 그 과정을 합 리화하는 데에 이 작품의 방점이 있는 것은 아니다. 오히려 우리가 눈여겨보아야 할 것은, 또한 공연 이 끝난 후 거듭 새겨보아야 할 점은, 개개인으로 쪼 개면 약간의 흠을 가진 한 인간에 지나지 않을 마을 사람들이 별 죄의식 없이 행하는 그 거대한 악 (惡)의 실체와 실현 방향, 그 불가역성 (不可逆姓)이다. 마을사람들은, 각자의 소박하고 대단치도 않은 동기로 악에 포섭되기 시작하지만, 마침내 그들 모 두가 합쳐져 하나의 실체로서의 악이 되어 행하는 비열함과 저속함, 무반성의 폭력은 거대한 괴물과 같은 악마의 모습을 그려낸다. 그렇다. 처음의 악은 별 것 아니었다. 그런데 그 것이 반성과 숙고 없이 쌓이고 반복될 때, 그것이 만들어 내는 파급력과 악마성(惡魔性)은 애초의 의 도나 현상을 훌쩍 뛰어넘는 것이 되고 만다. 히틀러의 명에 따라 수많은 유태인을 학살한 아 돌프 아이히만 (A. Eichmann)은 주어진 환경에서 상부의 명령을 충실하게 따르는 평범한 공무원이었 을 뿐이다. 그가 예루살렘에서 나치 전범으로서 재판을 받는 모습을 보며 한나 아렌트 (Hannah Arendt)는, 악 마처럼 생기지도, 일그러진 성애적 경향을 가지지 도 않은 그의 평범함에 더욱 놀랐다. 그의 가장 두 드러지고 유일한 부정적인 특징은 바로 ‘철저한 무 사유 (sheer thoughtlessness) ’ 였던 것이다. 이러한 악의 평범성 (The Banality of evil), 순전 한 무사유를 경계하는 가장 효과적인 방법은 무엇 일까? 필자는 그것이 바로 철학 과 예술 이며, 칸트 (I. Kant)가 말한 바의 사유와 경험의 괴리를 극복 하는 각기의 한 방편이라고 생각한다. 죄형법정주의를 공부할 때 자주 듣던 ‘반성적 고 려’ 라는 표현은, 재판정의 용어이긴 하지만 철학적 사고의 본질을 가리키는 적확한 표현으로도 볼 수 있을 것이며, 필자는 독서에 더해 이러한 예술작품 의 감상을 통해 보다 균형 잡힌 시각으로 사회를 보 고 미망(迷妄)을 극복하고자 하는 것이다. 우리는 의식하지 못하는 사이에 타자와 주변에게 얼마나 많은 폭력과 악을 행사하며 살고 있는지, 자 신과 가족의 안위를 위한다는 명분으로 얼마만큼 배 타적인 줄서기에 가담하고 있는지, ‘친환경’이라는 미명하에 또 다른 죽이기와 위선에 앞장서고 있지 않은지, 끊임없이 살피고 되돌아볼 일이다. ※한나 아렌트의 『예루살 렘의 아이히만』의 일독 을 권한다. 마침 베스트 셀러가 되어 있고, 철학 자 강신주 박사의 『철 학적 시읽기의 즐거움』 등을통해알게되었다. 7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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