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4 법무사 2월호

63 인문학의 창 사마천의간략한생애 한나라 조정에서 태사령(太史令) 벼슬을 했던 사 마담(司馬談 ? ~ 110 기원전)의 아들로서 기원전 145년 출생, 기원 전 90년 56세로 세상을 떠났다. 그가 활약한 시대는 한나라 전성기였던 무제 때였 다. 어려서부터 고전을 공부하고 20살에 아버지의 권유로 전국을 답사했고, 38세(기원전 108년) 아버 지가 세상을 떠난 지 3년 만에 ‘사관’이 된다. 벼슬 후에도 무제를 수행하며 전국을 주유했으 며, 초(楚)나라 애국시인 굴원(屈原)이 자살한 멱라 수( 汩 羅水), 한신(韓信), 소하(蕭何) 등의 고향을 찾 아 현장답사와 문헌 기록을 변증법적으로 소화해냈 다. 기원전 99년 태사령(太史令)에 임명된 지 10년 47세 되던 해, 뜻하지 않은 이릉(李陵)변호사건이 발생했다. 흉노토벌에 빛나는 공을 세웠던 이릉이 중과부적(衆寡不敵)하여 어쩔 수 없이 항복하자 일 제히 그를 성토하고 나섰다. 이러한 조정대신들의 행태에 대항해 사마천은 있 는 힘을 다해 이릉을 변호했다. 화가 난 무제는 사 마천을 옥에 가두었고, 이릉이 흉노에서 벼슬까지 받자 사태가 악화되어 사형판결을 받았다. 50만전 을 내면 사형을 면할 수 있었으나, 아무도 그를 구 하려 하지 않았고, 치욕적인 궁형(宮刑)을 자청하여 석방되었다. 그는 사기를 완성하기 위하여 사형보다 더 치욕 적인 형벌을 자청했던 것이다. 치욕스러운 형벌을 받은 사마천은 “이것이 나의 죄로다. 이것이 나의 죄로다! 아무 쓸모없는 불구의 몸이 되었구나” 라며 자책하기도 했지만 그 울분은 사기의 저술에 쏟았 다. 무제 역시 영민한 군주였기에 역린(逆鱗)을 건 드린 사마천에게 일시적으로 극형을 처하긴 했으나 곧 그의 비범한 재능과 충성심을 인정하고 봉록 5천 석인 중서령(中書令)에 임명했다. 사마천은 공무 외 모든 시간과 정력을 오로지 『사 기』 저술에만 바친다. 드디어 그의 나이 55세, 집필 에 착수한 지 19년 되던 해에 130권의 대 『사기』는 완성되었다. 절대역사서『사기』 『사기』는 130권으로 이루어진 3천년 통사이자 중 국 역사서 중 최초의 통사이다. 오늘날처럼 ‘사기’라 는 제목으로 불린 것은 삼국시대이후부터 이다. 사 마천은 과거 역사서들의 무수한 전통을 종합하여 소위 ‘기전체(紀傳體)’라는 새로운 역사 서술 체제를 창안했다. 이 체제는 사마천 이후 2천년 넘게 중국 역사서에 지대한 영향을 주었을 뿐만 아니라 한자 문화권 전체에 영향을 미쳤다. 기전체란 『사기』의 다섯 체제, 본기, 표, 서, 세가, 열전 중 본기의 기와 열전의 전자를 따서 붙인 이름 이다. 본기 12권, 표 10권, 서 8권, 세가 30권, 열 전 70권 총 130권이다. 사마찬의 뛰어난 학식에다 역사 현장에 대한 치밀한 탐방이 더해진 입체적 역 사서이다. 사마천의 영혼이라 할 『사기』의 중요한 특징은 다음과 같다. 첫째, 인간의 작용을 강조한다. 이를 위해 인간 이 역사의 중심임을 밝히고 다양한 유형의 인간을 위한 기록을 마련했다(「열전」). 사마천은 단순히 역 사 속에서 인간의 작용만을 강조한 것이 아니라 시 세(時勢)가 인간에 미치는 영향도 지적한다. 따라서 그가 그려내는 인간상은 입체적일 수밖에 없다. 둘째, 역사는 발전하고 변화하는 것임을 분명하 게 보여준다. 셋째, 물질적 생산활동이 역사에 미치는 작용을 중시하고 있다. 넷째, 과거를 거울로 삼으라고 충고한다. 역사의 경험과 교훈을 종합하기 위해 그는 과거 역사를 거울 로 삼아 그것이 던지는 메시지를 통찰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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