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4 법무사 2월호
“푸르고 푸르른 그대를 사랑하노라” 푸른몸푸른머리카락 푸르고푸르른그대를사랑하노라 - 가르시아 로르까의 시 「몽유시」 중에서. 몇 년 전의 일이다. 사무실에 한 초로의 노인이 빵모자를 눌러쓴 채 살며시 문을 밀고 들어왔다. 작 은 조각배처럼 미끄러져 들어왔다는 표현이 더 적 확할 것이다. 이마에는 주름이 굵게 패였고, 양미간 은 볼우물처럼 푹 꺼져있었지만 이상하리만치 검게 빛나는 두 눈만은 초롱초롱 살아 있었다. 나는 그가 빵모자를 벗어들고 훤하게 벗어진 이마를 드러내며 어색하게 희미한 웃음을 지을 때까지 전혀 알아보 지 못했다. 삼십여 년의 세월의 흔적이 고스란히 그 의 주름진 얼굴에 녹아 있었다. 스무 살을 막 넘긴 우리는 딱히 할 일이 없었다. 해가 뉘엿뉘엿 질 무렵이면 무슨 볼 일이 있는 것도 아니지만 마치 약속이라도 한 것처럼 헌 구두를 꿰 차고 거리로 나섰다. 삼남극장 앞 거리는 언제나 젊 은 파도로 일렁거렸다. 어쩌다가 돈 푼이라도 생긴 날에는 선술집을 순례하며 막걸리에 취해보기도 하 지만 대개는 아무런 목적도 없이 어느 유행가 가사 처럼 ‘거리에 나서면 난파선처럼 헤매어 다니는’ 것 이 일과였다. K(그의 이름을 밝히기에는 너무 송구스럽다)는 술은 잘 못하지만 나와 함께 선술집에 가는 것을 좋 아했다. 막걸리 한 잔에 취하면 그가 작사 작곡한 노 래를 불렀다. 가곡은 아니고 일명 ‘뽕짝’풍의 노래였 지만 서정적인 가사와 음률은 좌중을 매료시키기에 충분했다. 그는 제법 음악에 재능이 있었다. 내가 대학에 진학하면서 K와는 헤어지게 되었고, 그가 결혼할 때 내가 축시를 지어 낭송한 적이 있었으나 그 후론 풍문으로만 그의 소식을 접했을 뿐이었다. K의 가선 진 눈가 주름살을 따라가다 보니 희끗 희끗 빛나는 귀밑머리 너머 세월의 무상함이 보였 다. 그는 과묵하기도 했지만 사실 우리는 오랜 세월 의 틈을 쉽사리 메울 수는 없었다. 해장국집으로 자 리를 옮겨 콩나물국밥을 먹었다. 내가 한 그릇을 후 다닥 비우는 동안 아마도 서너 숟갈을 떴을 뿐인데 도 그는 모처럼 맛있게 먹었다며 활짝 웃었다. 근간 에 밥을 통 넘기지 못했는데 오늘 가장 많이 먹었다 는 것이다. 나는 미주알고주알 지나온 세월을 물어보지는 않 았지만 그가 죽음의 문턱에 거의 다다라 있다는 것 을 직감적으로 느낄 수 있었다. 문득 그에게 우리의 푸르렀던 젊은 시절의 얘기를 꺼낸다는 것은 사치 에 불과할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모리와 함께한 화요일」을 쓴 작가 미치 앨봄은 20여년 만에 재회한 스승 모리에게 태연하게 묻는 다. “어떤 기분이죠? 죽어가는 것은?” 그는 마치 강 의를 듣다가 의문나는 점을 질문하는 학생같았다. 그러나 나는 K에게 아무 것도 물을 수 없었다. 다 만 그가 단편적으로 내뱉는 말을 주워모아 보건대 전혀 회생의 가망이 없는 위암 말기가 아닌가 추측 하였을 뿐이다. 삶과죽음에의키스 임 익 문 ■ 법무사(전라북도회) 법무사의서재 미치 앨봄의 「모리와 함께한 화요일」 『 』 2014년 2월호 6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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