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4 법무사 2월호

날씨에도 불구하고 폐지를 주워 모으고 있었다. 민 족의 명절이라는 설날, 그 노인은 앙상하고 쇠약한 몸으로 종이를 모아 어디론가 운반을 하고 있었다. 커다란 선물 바구니를 든 사람, 대형 승용차에 무 엇인가를 싣는 사람, 깔깔대며 색동한복을 곱게 차 려입은 사람들, 주변을 오가는 그 많은 사람들은 누 구 하나 노인에게 눈길조차 주지 않았다. 추위에 몸 을 동그랗게 구부린 채 노인은 바람에 날아다니는 폐지들 줍기에 골몰하고 있었다. “정말 잘 키웠어. 훌륭한 어른이 될 거야…” 내 곁에서 연을 날리던 아이는 연날리기를 중단 하고 그 노인을 바라보았다. 그러다 잠깐 망설이는 듯하더니 이내 몸을 돌려 노인에게 다가갔다. 그리 고는 종이를 주워 모으기 시작했다. 아이를 쳐다보 던 노인의 눈에 갑자기 생기가 돌며 얼굴에 미소가 흘렀다. 아이는 환한 미소를 지으며 더 많은 폐지들을 모 으기 시작했고, 나 역시 그 일에 동참할 수밖에 없 게 되었다. 잡을 수 없는 환영처럼 서쪽 하늘에 노 을이 질 무렵 꽤 많은 폐지더미들이 수집되었다. 머 릿속으로 아우에게 해줄 말이 떠올랐다. ‘추위에 떨고 있는 노인이 불쌍해서 차마 그냥 갈 수가 없는 그 마음. 너는 아이를 매우 잘 키웠으며 앞으로 이 아이는 훌륭한 어른이 될 것이라 믿어 의 심치 않는다. 선행학습을 통해 지성을 가르치는 것 도 중요하지만, 더 중요한 것은 인격이다. 인격 없 이 지성만 갖춘 이들이 많은 세상은 위태로울 것이 나, 지성이 다소 모자라도 인격 있는 자가 많은 세 상이라면 한층 향기로워질 것이기 때문이다...’ 대한민국은 건국 당시(1948년) 1인당 국민소득 50달러였던 최빈국에서 2013년 현재 2만4천 달러 를 돌파하는 나라가 되었다. 절대빈곤을 벗어났으 니 그럭저럭 행복해질 법도 한데, 지금 우리들이 스 스로를 불행하다고 여기는 까닭은 무엇일까. 타인과 건강한 관계를 맺는 대신 무한경쟁의 절 대강자를, 행복을 추구하는 다양한 가치들 대신 학 력 서열화와 안정된 출세에 꿈과 현실을 저당 잡힌 결과, 우리 모두가 행복이라는 바늘구멍을 통과하 고 싶은 낙타가 된 것은 아닌지. 열한 살 어린 아이 가 과연 감당할 수 있는 세상인지…. 녀석과 나는 그네에 걸터앉았다. “큰 아빠, 고백할 게 있어요. 학원 다니는 게 너 무 힘들고 싫어서 몇 번 빼먹었어요. 엄마 아빠한테 는 일러주지 마세요.” 아이는 온몸을 파르르 떨었다. 나는 이어폰 한 쪽 을 아이의 귀에 꽂아주었다. “이거 무슨 음악이어요?” 눈을 껌뻑이며 아이가 물었다. “베토벤 알지? 「비창」이란 제목의 음악이야.” 아이는 한참을 음악에 몰두하는 표정이었다. “큰 아빠! 이 음악... 참 슬퍼.” 우린 베토벤의 피아노 소나타 8번 「비창」 2악장을 함께 들었다. 말이 끊어진 곳에서 음악이 열린다. 나는 아이와 「비창」을 들으며 아이의 슬픈 눈을 오 랫동안 바라보았다. 갑자기 내 온 몸의 세포가 미세 하게 경련하며 뭔가 울컥하는 게 치밀어 올랐다. 69 음악과 인생 ▶ 베토벤의 『비창』 앨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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