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4 법무사 3월호
권두언 신라의통일과 한반도의미래 윤 수 남 ■ 전국회의정연수원장 중국의대한반도정책변화, 통일에대한기대감커져 1992년, 중국은 북한의 완강한 반대에도 한국과 수교를 맺었다. 그러나 당시 양국 무역량의 급증에도 불구하 고 남북한관계에 있어서는 ● 한반도에서의 전쟁방지(부전 不戰), ● 북한혼란방지(불란 不亂), ● 남한에 의한 흡 수통일 반대(불통 不通), ● 비핵화(1무 一無)라는 ‘3불 1무’ 원칙을 고수함으로써 여전히 북한을 고려하였다. 하지만, 2012년 이른바 북한의 제3차 핵실험 이후 중국은 달라지기 시작했다. ‘3불 1무’ 원칙 대신 ‘비핵 화’, ‘안정과 평화 유지’ 그리고 ‘대화를 통한 문제해결’을 공식적인 대한반도 정책으로 강조하면서 북한과의 특수관계를 인정하지 않겠다는 입장을 보이고 있다. 이러한 중국의 대한반도 정책은 중국의 국제적 지위 향상과 북한핵기술의 급속한 발전 등에 따른 것으로 과 거와는 상당히 다른 변화다. 이에 따라 한국에서도 통일에 관한 관심이 높아지고 있다. 이런 점에서 삼국시대 ‘당나라’라는 대국의 힘을 이용해 삼국을 통일시킨 신라의 전략을 검토해 보는 것도 큰 의의가 있을 것이다. 오늘날의 중국은 신라가 백제와 고구려를 통합, 삼국통일을 이룬 550~650년대의 당나라와는 많은 차이 가 있다. 당나라의 건국은 수나라의 생성, 발전 및 멸망을 배경으로 하고 있다. 4차례에 걸친 고구려의 침략 을 이기지 못하고 수가 붕괴함으로써 당나라가 등장하였고, 이후 고구려의 붕괴를 추진하던 당나라는 독자적 인 힘만으로는 이것이 불가능하자 신라의 3국통일 제안을 받아들여 협공으로 신라는 백제를, 당나라는 고구 려를 통합하는 방향으로 흘렀다고 추측할 수 있다. 하지만, 세계주의를 표방한 당나라는 이후 신라를 포섭하지 못했는데, 그 이유는 무엇일까? 신라는 6세기 초까지도 한반도의 3국 중 가장 후진지역이었으나 신라 제24대 진흥왕(540~576) 대에 이르러서야 대내의 이질세력이었던 가야세력을 통합하여 김해평야를 활용할 수 있었고, 그뿐 아니라 한강유역으로 영토를 확장 하면서 정복국가의 위상을 갖추기 시작했다. 게다가 진흥왕 시대에 이르러 신라는 당시 아시아에서 정신적, 물질적으로 초강대국이었던 당나라와 직접 접촉할 수 있는 교두보를 확보함으로써 대내적으로 국력이 한층 더 발전하는 계기를 마련했다. 당시 모처럼 확보된 국력을 지속화시키기 위해서도 한반도의 통일을 충분히 모색할 수 있었다고 상상할 수 있다. 또한 진흥왕이 불씨를 놓았던 신라정치는 다른 나라와 달리 꺼지거나 무력화되지 않고 계속 이어졌다. 진 평왕에 이어 즉위한 선덕여왕은 ‘삼국통일’이라는 새로운 목표를 제시, 그를 향해 불붙기 시작했다. 선덕여왕 은 쇄락하던 왕실의 외손 김춘추와 신라정치의 비주류로 전락했던 가야세력의 대표 김유신을 발탁, 중용함으 로써 ‘삼국통일’의 목표에 활력을 불어넣었다. 『 』 2014년 3월호 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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