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4 법무사 3월호
에만 전념한 아들 둘이 있사옵니다. 이들에게 나라 의 용역이 있으실 때 찾아 주시면 보은에 감사하도 록 하겠나이다.” 역시 그릇이 크면 많은 것을 담을 수 있는 여유가 있음에서인지 이태조는 “길재가 살고 있다는 땅 주 위 사방 십리에 누구든 얼씬도 하지 말지어다”라는 엄명으로 길재에게 형벌 대신 관용을 베풀었음에라. 길재는 더욱 더 인재를 구하여 학문을 닦도록 하여 공자의 말씀을 후세 영원토록 기리도록 한 업적은 앞 으로도 우리 후세에게도 기념이 될 것이며, 특히 공 직자의 지침서로 배움의 상징되는 『목민심서』의 저자 정약용보다 더 큰 인물이라고 필자는 단정한다. 이방원, 즉 태종은 즉위하여 바로 그 다음 해에 “지금 길재가 살고 있는 땅은 황무지이니라. 그에게 상당의 옥토로 바꾸어 주도록 하여라”하는 태종의 명에 대하여 길재는 “아니 되옵니다. 학자에게는 그 배움터와 일용되는 양식만 있으면 됩니다”라며 옥 토의 일부분만 사림파(士林派)의 용역으로만 사용 하였음이어라. 길재는 오늘의 유교사상을 확립시킨 학자로서 그 를 따르고 기리는 자들의 일부를 열거한다면 연산 군에 의하여 무오년에 부관참시 된 김종직, 김굉필, 서화담, 조광조에 이어 이황(퇴계) 등 많은 성리학 자들이 이 나라를 동방예의지국으로 승화시킨 분들 이었음이라. 세종 원년(실록 1418년) 11월 24일, 어전회의에 서 세종은 “상왕께서의 말씀대로 길재의 자손 중 재 주 있고 어진 사람을 찾아 추천토록 하여 용역토록 하시요”라고 하였는 바, 이렇게 작은 일에도 실록에 담아 사초(史草)로 삼도록 하였으니! 서해바다 속에 잠겼는가? 임금님의 한 마디 어명은 영원한 사초. 그리고 임금님의 백 마디 어명도 분명한 사초임에 백 마디 어명은 그 무게로 인하여 서해 바다 깊숙이 잠겨 찾 지 못하나요. 이는 분명 우리를 슬프게 하는 짓이었 노라! 길재도 나이 들어 그 날의 회한이 서린 고려 의 도읍지가 궁금하여 오백년도읍지를匹馬로 돌아보니 인걸은간데없고山川만이依舊로다 어즈버태평연월을서러워하노라. 길재의 삼행시조(三行時調)에 이은상의 「옛 동산 에 올라」의 삼행시에서 내놀던옛동산에오늘와다시서니 山川依舊란말 옛시인의虛辭로고 예섰던그큰소나무베어지고없구려. 두 분 시의 2행에서의 ‘산천의구’와 ‘산천의구, 허 사’에 있어서 세월의 간격은 600년. “두 분 시인의 말씀은 옳습니다”라고 하기에는 바로 인간의 허사 (虛辭)로다. 오직 자연만이 알고 자연만이 슬퍼할 일이로다. 67 수상 길재는 더욱 더 인재를 구하여 학문을 닦도록 하여 공자의 말 씀을후세영원토록기리도록한업적은앞으로도우리후세에게도 기념이될것이며, 특히공직자의지침서로배움의상징되는 『목민 심서』의저자정약용보다더큰인물이라고필자는단정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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