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4 법무사 5월호

67 인문학의 창 ‘연암 박지원’하면 떠오르는 이름들이 있다. 다산 (茶山) 정약용(丁若鏞), 그리고 연암과 다산이 살았 던 시대의 왕 정조, 이 세 사람의 삼각관계를 이해하 면 연암의 사상과 그 시대의 기반을 통찰할 수 있다. 보통 두 사람을 실학파로 분류하지만 사실 두 사 람은 세계관, 삶의 스타일, 문체, 당파 등 모든 면에 서 현격한 차이가 난다. 연암은 노론(老論)의 명문가 출신인데다 어렸을 때부터 뛰어난 문장을 쓸 정도로 천재였지만 과거를 통해 관직에 나가는 것을 포기한 반면, 다산은 재야의 남인(南人)출신으로 과거공부 를 열심히 해 관료의 길을 걷는다. 연암은 권력의 중심에서 원심력(遠心力)을 가지고 지속적으로 벗어났고, 다산은 구심력(求心力)을 가 지고 계속 달려갔다. 두 사람은 실학사상을 갖고 있 었으나 함께 사대문 안에 살면서도 평생 한 번도 만 나지 않았으니 아주 놀라운 일이다. ▶연암박지원의생애 ● 과거 포기한 청춘 : 당시 집권당파인 노론의 명 문가에서 태어났지만, 일찌감치 과거제도의 타락상 과 백이면 백, 천이면 천, 판에 박힌 듯 똑같이 써내 는 과문의 격식에 실망하여 과거를 포기하고 의기투 합하는 벗들과 어울려 청춘을 보냈다. ● 저잣거리로 나선 연암 : 연암의 사유와 그가 보 여준 행로를 따라가 보면 그는 규격화되고 제도화 하는 것을 극렬하게 싫어하는 기질을 가지고 있었 으며, 그런 기질이 표출된 것 중의 하나가 우울증이 다. 비만하고 호방한 눈매, 카리스마를 지닌 연암이 청년기에 우울증에 걸렸다는 것은 미스터리다. 그는 병을 치료하기 위해 길거리로 나섰고 그 과 정에서 분뇨장수, 이야기꾼, 도사, 건달들과 만나 친구가 되었다. 이를 이야기로 엮은 것이 『방경각외 전(放 璚 閣外傳)』(1756년 전후)다. ● 가장 빛났던 30대와 친구들 : 부도, 명예도 없었 건만 그래도 30대는 그의 생애 가운데 가장 빛나는 시절이었다. 함께 웃고 울어주는 벗들이 있었기 때 문이다. 이름하여 ‘백탑(白塔)에서의 청연(淸緣)’! 30대 중반 즈음 연암은 이 모임을 이끌었다. 백탑 은 파고다공원에 있는 원각사지 10층 석탑을 말한 다. 당시 연암과 연암의 벗들이 이 근처에 주로 살았 기 때문에 생긴 명칭이다. 스스로를 ‘간서치(看書痴)’, 곧 책만 보는 바보라 고 칭한 이덕무의 사립문이 그 북쪽에 마주서 있고, 이서구의 사랑채가 서편에 있었으며, 조금 떨어진 곳에 서상수의 서재가 있었고 또 북동쪽으로는 유 금, 유득공의 집이 있었다. 천재 과학자이며 음악가인 홍대용, 괴짜 발명꾼 정철조, 조선 최고 창검술의 보유자 백동수 등도 연 암의 자랑스러운 친구들이었다. 그때 그들을 사로잡 는 윤리적 강령은 오직 하나뿐이었다 “벗이란 제2의 나다.” 하지만 백탑에서의 빛나는 시절은 오래 가지 않았다. ● 북학파 : 세상에서는 연암과 그의 벗들을 ‘북학 파’라고 부른다. 북학, 곧 청나라로부터 배운다는 뜻 이다. 당시의 지배적 이념은 북벌(北伐)이었고 ‘소중 화(小中華)’론과 짝을 이루는 이념이다. 이는 명나라의 멸망과 더불어 중국문명의 정수는 중국에서 조선으로 옮겨 왔다는 사상을 말하지만, 북벌론은 실제로 조선 내부를 통치하기 위한 이데올 로기로 기능하고 있었다. 연암과 그의 벗들은 이런 허위의식을 용납할 수 없었고 허울 좋은 북벌론을 벗어던지고 청나라부터 그 문명의 정수를 배우자는 북학의 기치를 높이 내건 것이다. ● 「열하일기」와의 조우 : 1776년 정조임금이 왕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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