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율곡의생애 율곡의 집안은 빈한했다. 가난은 평생 그를 따라 다녔고, 그가 부양할 가족들은 적지 않았다. 일찍 죽은 형의 자식들조차 그에게 남겨진 짐이었고, 생 계를 위해서 그는 과거(科擧)시험에 매달릴 수밖에 없었다. 절친한 친구 성혼倻沿[)조차 절박한 ‘경제 적’ 사정을 이해하지 못하고, 도학의 원칙을 들어, 그를비난했다. 간단히 율곡의 생애를 살펴보면, 1536년 12월 강 릉 생으로 어머니 신사임당은 용(龍)이 아이를 건네 주는 태몽을 꾸고 율곡을 낳아 그 이름을 ‘현룡(見 龍)’으로 지었다. 율곡은 이미 8세 때 「파주 화석정 (花石亭)」이라는 시를 지을 정도로 문재가 뛰어났다. 16세 되던 해 어머니 선사임당의 상을 당하고, 19 세에 3년 상을 마친 후 금강산에 입산해 불교를 접 한 후 하산, 23세에 도산에서 퇴계를 만났다. 29세 이던 1564년에는 아홉 번을 내리 장원한 천재(구도 장원공 九度壯元公)로 이름을 날렸고, 이후 삼사(三 司)를 주로 거치며 정치에 입문한다. 그러나 동서붕당의 조짐 속에서 선조의 우유부단 함에 환멸이 커져 자주 상소를 올려 사의를 표했으 며, 42세 되던 1577년 은거하던 해주에서 『격몽요 결읊广지었다. 하지만말년에는다시 정계로복귀해 이조판서와 병조판서를 역 임하였고, 1584년 49세 의 나이로 서세(避世)한다. 서 유교가 내세운 대표적인 고전들은 사서삼경(四書 三經)임을 다 익히 알고 있으며 여기 『격몽요결오: 삶의 기술에 대한 유교적 입문 또는 기초를 담고 있 다. 율곡은 ‘학문을 삶의 기술’, ‘인간으로서 살면서 익혀야 할 최초이자 최후의 기술’이라고 유교적 관 점에서 학문을 정의했으며, 이것을 현대용어로 ‘인 문학’이라부른다. 『격몽요결』의 서문은 이렇게 시작한다. “사람이 세상에 태어나 사람노릇을 하자면 공부 (學問)률 해야 한다. 공부(學問)라는 것은 무슨 남 다른, 특별한 어떤 것이 아니댜 일상적 삶에서, 관계 와 거래에서, 일을 적절히 처리하는 법을 배우는 것 일 뿐이댜 아득하고 기묘한데 마움을 써서 특수한 효과를보태는것이 아니댜 공부를 안 하면 마음은 잡초로 뒤덮이고, 세상은 캄캄해진다. 그래서 책을 읽고 지식을 찾는다 지식 이 길을 벌悼1 줄 것이니, 오직 그때라야 정신의 뿌리 가튼튼해지고합당한행동을하제 되는것이댜" 유교의 학문은 이처럼 낄’을 찾기 위한 것이다. 길 (道)이란 ‘‘인간관계와 일상의 삶에서 마땅히 밟아야 할 선택들’’이다. 실제 ‘철학’이 그 일을 하였으니 사람 들이 역시 도(道)를 가장 목말라 하고 있지 않을까. ► 유교, 그 ‘일상’의 길 ► 학문이란 무엇인가? 삶의 기술이다! 유교는 이 ‘학문’에 두 개의 함정이 있어 경계해야 한다고 한다. 한쪽은 ‘속학(俗學)’이다. 교과서를 외 19세기 철학자쇼펜하우어(ArthurSchopenhauer) 우고 시험을 치고 교양의 도구로 쓰는 ‘지식’과 그 는 인문학을 ‘고전작가들에 대한 연구’라고 말했다. 전파를 가리킨다. 다른 쪽은 ‘종교’이다. 이 세속에 고전을 통해서야 비로소 우리가 인간이 될 수 있다 염증을 내고 ‘초월’에서 길을 찾는 모든 경향들을 총 고 보았기 때문이다. 고전을 쓴 분들에게 배우고, 경 칭한다. 청하는 것이 고전학, 곧 인문학이다. 율곡의 시대, 속학은 과거(科擧)였으며 초월은 불 동서양의 고전은 무궁하고 다양하다. 그 가운데에 교(佛敎)였다. 율곡은 어려서부터 속학을 경멸했 _ o 인문학의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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