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5 법무사 2월호

72 박 형 락 법무사(서울북부회) 1945년 봄, 초등학교를 졸업한 나는 아버지의 농사 일을 거들면서 조상대대로 도 그랬고, 부모님도 평생 을 뼈 빠지게 일해도 농민 은 가난에서 벗어나지 못한 다는 것을 실감했다. 그래서 나는 반드시 다른 직업을 가져야하고, 그러자면 어떻게 해서라도 학문의 길에 도전을 해야겠다고 다짐했다. 그해 여름. 꿈에도 생각지 못했던 8·15 해방이 찾 아오고 세상이 바뀌었다. 이제는 한글로 된 책으로 학문을 시작해야 할 터였지만, 한글로 된 책을 구입 할 수 없는 벽촌, 독서를 할 수 없는 농촌생활은 무미 하고 지루했다. 소를 풀 먹이러 가서는 소를 놓아두고 풀밭 언덕에 홀로 앉아 멀리 서쪽 낭림산맥의 고봉준령을 바라보 면서, 나의 꿈인 학문을 어떻게 이룰 것인가 생각에 잠기곤 했다. 그런데 서산에 노을이 붉게 수놓을 무렵 이면 문득문득 정답던 학우들이 그리워지고, ‘가네시 로(金城=金씨의 창씨姓)’라는 한 여학생의 얼굴이 눈 앞에 선해지는 것이었다. 그 여학생은 나와 같은 6학년으로 을 반이었다. 학 교길이 멀었던 나는 등교를 서둘다가 가끔씩 책을 빠 뜨리곤 했는데, 그럴 때는 을 반으로 가서 친구를 불 러 책을 빌려 달라고 했다. 그때마다 복도 창가 책상 에 있던 가네시로가 책을 꺼내들고는 “여기 있으니 갖 다보세요”라고 했다. 그녀는 일본말이 유창하고 목소리가 고왔다. 그때 는 일본강점기로 학교에선 일본어를 상용하긴 했지 만, 나는 그녀가 유달리 일본말을 잘한다고 생각하면 서 책을 돌려주곤 했다. 졸업할 무렵 알게 됐지만, 그 녀의 어머니는 일본 사람, 아버지는 한국 사람이었다. 이제 일본이 패전했으니 그녀도 일본으로 갔는지 궁금하고, 웬일인지 그녀의 한결같던 친절이 새삼스 레 고마운 생각이 들면서 보고파지는 것이었다. 그해 9월 중순 어느 날, 아버지가 내게 “아래 마을 김 씨 아저씨와 흥남과 함흥에 간다. 일본 사람들이 떠나면서 가재도구를 헐값에 판다고 해서 그것을 사 볼까 하는데, 네가 일본말 통역을 할 수 있겠나?”라고 하셨다. 나는 할 수 있다고 했다. 해방 직후 북한 땅에 거주하던 일본 사람들에게 출국명령이 내려지자 38 도선 이남으로 봇짐을 지고 무리지어 걸어가는 일본 인들이 곳곳에서 목격되던 때였다. 그리하여 나는 생전 처음으로 4~50리 거리에 있는 큰 도시 흥남과 함흥으로 나들이를 떠나게 되었다. 단벌옷인 당목 홑바지 저고리에 짚신을 신고, 교통편 이 없는 먼 길을 걸어가야 하니 짚신 한 켤레로는 부 족해 여분 한 켤레는 허리춤에 차고 길을 나섰다. 흥남으로 가는 도로는 가네시로가 사는 ‘연포리’라 는 마을 가운데로 나 있었다. 나는 그 길을 지나면서 우연히라도 가네시로를 한 번 보고 싶은 마음이 간절 했다. 하지만 행색이 이렇게 초라하니 가네시로가 나 그리운 ‘ 가네시로 ’ 와 학문의길 수상 유창한 일본어, 목소리가 고왔던 가네시로 그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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