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5 법무사 2월호
73 『 법무사 』 2015 년 2 월호 수상 를 보면 실망하지 않을까 걱정도 되고, ‘ 나를 본다 해 도 옷차림 때문에 몰라볼 지도 몰라, 그래도 만나면 어떻게 하지? ’ 하고 고민도 되었다. 하지만 광호(廣湖) 의 큰 다리 연포교를 건너 연포리를 지나가도 그리운 가네시로는 보이지 않았다. 그로써 보고파 나 혼자 그리워하던 가네시로에 대 한 환상은 세월과 함께 먼 기억 속에만 남게 되었다. 하지만 도시로 처음 나들 이를 가는 내 마음은 즐겁 고 설레었다. 장마가 지난 후의 초가을 맑은 하늘과 햇빛은 신작로 모래 위에 반짝이고, 함흥평야의 드넓 은 벌에 익어가는 곡식들, 새 세계를 발견하는 것과 같은 황홀함은 막이 올라가고 빛이 쏟아져 들어오는 무대장면과 같다고나 할까, 발걸음은 짚신보다 가벼 웠고 눈엔 볼거리가 가득 넘쳤다. 들판의 도로로 가다가 성천강의 군자교를 건너니 포장도로고 흥남시다. 일행은 천기리에 도착했고, 사 촌 누님 집에서 하룻밤을 묵었다. 흥남에 살던 일본 사람들은 거의 살림을 정리하고 이미 떠나버려서 우 리는 다음날 함흥으로 갔다. 가는 길가에 이성계가 살았다는 본궁(本宮)을 쳐다 보며 걷다보니 짚신 바닥이 다 닳아 해어졌다. 옆구리 에 찼던 짚신을 찾으니 어디서 떨어졌는지 없다. 어쩔 수 없이 맨발로 걷자니, 키는 어른 키만큼 자라서는, 함흥시가지를 나만 맨발로 걷는 것 같고, 오가는 사 람들이 내 발만 쳐다보는 것 같아 창피했다. 일행은 함흥 기차역 근방의 일본인 마을에 이르렀 다. 첫 번째 집 앞에서 나는 일본말로 주인을 찾았다. 50대로 보이는 일본 남자가 나와서 무슨 일이냐고 했 다. 내가 “실례합니다만 뭐 파실 물건이 있으면 사 볼 까 해서 왔습니다”라고 하니, 그는 퉁명스럽게 “장사 꾼이군?”이라고 한다. 내가 장사꾼이 아니라고 하자 그는 볼멘소리로 “나이!(없어)”라고 매정하게 말하고 는 집안으로 들어갔다. 결국 우리는 일본인에게 물건 사는 것을 포기하고 그냥 돌아왔다. 그런데 그 해 겨울의 어느 날 아침, 부엌 문 앞에서 주인을 찾는 일본인 여자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문을 열고 보니 얼굴이 창백해 보이는 일본 여자였다. 나는 무슨 일인지 밖이 추우니 들어와서 말하라고 했다. 부엌에 들어선 그녀는 먹을 것이 없어 굶었는 데 먹을거리를 좀 달라고 했다. 먹을거리란 어떤 것을 원하느냐고 물었더니 그녀는 부엌을 살피고는 구석에 있는 감자무더기를 손으로 가리켰다. 눈대중으로 대충 5kg 정도 될 것 같은 감자였는데, 알이 작아 개밥으로 남겨두었던 것이었다. 나는 그것 을 다 가져가라고 했다. 일본 여자는 보자기에 그 감 자를 싸가지고는 몇 번이고 머리를 숙여 고맙다고 하 면서 떠났다. 미·일 전쟁이 발발한 전후 우리 식구는 배급받은 대두박(大豆粕)이 떨어져 끼니를 걸러 본 적이 있고, 질경이 풀을 뜯어다 쌀 한 줌 넣고 죽을 쑤어 먹으면 서 연명한 일도 있었는지라, 굶주림의 고통을 알고 있 었다. 나는 그 일본 여자가 떠나간 후에 40세가 조금 넘 어 보이는 중년의 그녀가 혹시 그 마음씨 고운 가네시 로의 어머니일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겨울이 깊어가는 때 희소식이 들려왔다. 초등학교 강단에서 방학을 이용해 『한글맞춤법 통일안』이라는 책자로 맞춤법과 한글 강의를 하니 청강하라는 소식 이었다. 나는 하루도 빼지 않고 열심히 수업을 들었다. “뜸뿍 뜸뿍 뜸뿍새 논에서 울고, 뻐꾹 뻐꾹 뻐꾹새 숲에서 울 제…” 그때 처음으로 배운 동요 「오빠생각」과 「반달」을 먼 훗날 천리타향에서 돌아갈 수 없는 고향을 그리며 불러보리라고는 당시에는 상상도 못했었다. 그날 이후 나는 한글로 된 책을 수소문해 여기저기 서 빌려다가 읽으면서 한글을 익혔고, 기나긴 학문의 길은 그렇게 시작되었다. 쫓겨나는일본인에 대한 기억과 한글 공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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