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5 법무사 7월호

70 인문학의창 1. 김시습과 그의 저서들 김 시 습 [ 金 時 習 , 1435(세종17)~1493 (성종24)]은 우리에게 는 『금오신화』의 저자 로 유명한 인물이다. 세조시대 생육신(生六 臣) 중 한 명이었고, 당대 최고의 사상가이자 문인이었 다. 자는 열경(悅卿), 호는 대표적으로 매월당(梅月堂). 생후 8개월에 글의 뜻을 알았고, 3세에 능히 글을 지 을 정도였으며, 5세 때 세종의 총애를 받아 후일 중용 하리란 약속과 함께 비단을 하사받기도 했을 정도로 천재성이 뛰어났다고 한다. 그는 당시 이름난 유학자였 던 이계전(李季甸), 김반(金泮), 윤상(尹祥)에게서 수학 했고, 이름 ‘시습(時習)’을 논어(論語)의 학이편(學而篇) 중 “때때로 익히면 즐겁지 아니한가”라는 구절에서 따 왔을 만큼 정통 유학을 공부한 사람이다. 그러나 21세때완전한생의전환기를맞게되는데, 삼 각산(三角山) 중흥사에서 과거를 준비하며 수학하던 중, 수양대군이 단종을 몰아내고 대권을 잡았다는 소식을 듣고서 그 길로 삭발을 하고 중이 되어 방랑의 길을 떠 나버린 것이다. 당시 그는 관서, 관동, 삼남지방을 돌아 다니면서 백성들의 삶을 직접 체험했는데, 그때의 시편 들이 『매월당시사유록(梅月堂詩四遊錄)』에남아있다. 31세 되던 세조 11년 봄, 그는 경주 남산(南山) 금오 산(金鰲山)에서 성리학(性理學)과 불교를 연구하는 한 편, 우리나라 최초의 한문소설 『금오신화』를 저술한다. 그리고 37세 때는 환속해 서울 성동(城東)에서 농사를 지으며 현실 삶에 적응하는 듯 했으나, 이내 현실 모순 에 대한 실망으로 은둔과 방랑의 생활을 계속한다. 그 리고 충청도 홍산(鴻山) 무량사(無量寺)에서 59세를 일기로 일생을 마감했다. 김시습은 현실과 이상 사이에서 어느 곳에도 안주하 지 못한 채 기구한 일생을 보냈다. 그의 사상과 문학은 이러한 고민에서 비롯한 것이다. 전국을 주유하며 사 상적 시야를 넓혔던 그는 당시의 정치사상적 혼란을, 유·불·도 삼교(三敎)를 원융적(圓融的) 입장에서 일치 시키는 것으로 해결하고자 했다. 불교적 미신은 배척했지만, 불교의 종지(宗旨)는 자 비로서 만물을 이롭게 하고 마음을 밝혀 탐욕을 없애 는 것으로 파악해 받아들였고, 비합리적인 도교의 신 선술(神仙術)은 부정했지만 기(氣)를 다스림으로써 천 명(天命)을 따르게 하는 데 가치가 있다고 생각했다. 즉, 그는 음양(陰陽)의 운동성을 중시하는 주기론적 (主氣論的) 성리학의 입장에서 불교와 도교를 비판적 으로 흡수해 자신의 철학을 완성했으며, 궁극적인 실 천을 중시하였다. 2. 『매월당집( 梅月堂集 )』, 유학자이자 승려의 시문집 김시습의 『매월당집』은 전 23권 6책의 시문집이다. 이 상 진 법무사(서울중앙회)·본지편집위원·법학박사 꿈꾸다죽은 천재, 김시습의『매월당집』 · 『금오신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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