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5 법무사 7월호

72 인문학의창 4. 다채로운 경계인, 김시습 김시습은 매우 다채로운 인물이다. 격식에 얽매이지 않은 자유로운 문인이었고, 동시에 유가 성리학과 정 통 유가사관의 주제를 저술했던 참여 지향적 선동가였 으며, 불교의 철학적 사유를 유교의 이상과 연결시키려 고심했던 철학자이기도 했다. 또한, 몸과 생명을 중시하며 수련도교를 실천한 혁신적 사상가이자백성들의고달픈삶을동정한인도주의자,그리 고국토산하의아름다움과그속에깃든역사미(歷史美)를 발견했던여행가였다. 이모든것이김시습의모습이었다. 1) 좌절한 천재 김시습은 5세 때 세종대왕에게 불려가 천재성을 인 정받으며 ‘오세동자 (五世童子)’로 불렸고, 장차 나라의 큰 동량이 되리라는 온나라의 기대를 한몸에 받았던 인물이었다. 하지만 그는 일생동안 단 한 번도 정치에 참여하지 않았으며, 평생을 방랑생활로 보냈다. 우리나라 사상가 중에 머리가 뛰어난 사람은 많지만, 김시습처럼 일생동안 자기사상을 체화해 실천하려고 애쓴 사람은 없었다. 삶을 지식이 아니라 한 사람의 영 혼, 인간의 마음과 정신으로서 살아가고자 했던, 가장 절실한 모습을 보여준 사람이었다. 김시습은 당대 최고의 석학이었으나 결코 자신의 지 식을 권력에 이용하려 하지 않았고, 대신 부조리한 정 치집단에 대해 가차 없는 비판을 했으며, 그의 글들은 사람들에 의해 베껴져 정치평론으로 읽혔다. 그런 점에 서 그를 ‘참여형 선동가’라 불러도 무방한 것이다. 김시습은 진리라면 어떤 종파를 가리지 않고 받아들 여통합했고, 자기삶의사상으로만들어가려했다. 후손 을남기지않은그였지만사후선조에의해 『매월당집』이 발간되었고, 『금오신화』도오늘날까지전해져내려온다. 김시습의 삶에 대해 흔히 ‘광기(狂氣)의 발동’이라고 일컫는 사람도 있으나, 사실 미쳤다기보다는 부조리한 현실이 그로 인해 ‘광기’를 드러낼 수밖에 없도록 만들 었다는 것이 맞을 것이다. 한 번은 한양거리에서 공신 정창손(鄭昌孫)을 만나 “너 같은 놈들 때문에 정치가 제 대로 안 된다”고 당당하게 소리를 질렀다고 하는데, 우 리 역사상 그처럼 부조리에 대해 광기 어린 분노를 내 뿜은 사람도 없을 것이다. 불교에서는 인간을 비기(悲 器) 즉, ‘슬픔의 그릇’이라고 표현하는데, 김시습은 평생 을이러한슬픔을극복하는방법을찾고자노력하였다. 2) 절의(節義)를 지키다. 김시습에게는 항상 ‘맑을 청(淸)’자가 따라다닌다. 권 력에 종속하지 않고 끝까지 자신의 정의관을 실천하고 자 했던 그는 ‘유교적 절의’를 중시하였고, 그로 인해 동 인, 서인, 남인, 북인, 노론, 소론 등 파당을 불문하고 사대부뿐 아니라 민중들까지도 그를 사랑했다. 그는 불 의에 대해선 날선 비판을 했지만 결코 한 개인에 대한 비난을 하지는 않았다. 3) 끝없이 봉사하는 삶, ‘피모대각(被毛戴角)’의 가르침 김시습의 삶과 사상은 불교의 관점에서 ‘피모대각(被 毛戴角)’이란 말로 설명할 수 있다. ‘피모대각’은 ‘짐승의 털을 입고 머리에 뿔을 인다’는 의미로, 한 마리의 소 (牛)가 되어 인간세계에서 쟁기를 지고 끝없이 밭을 간 다는 뜻이다. 불교에서 가장 높은 도의 단계는 남을 위 해서 끝까지 봉사하는 모습이다. 2009년 성철(性澈)스님의 서고(書庫)에서 김시습이 1474년한문으로쓴 「십현담요해(十玄談要解)」의한글언 해본이 발견되었다고 한다. 이 책은 삶에서 가장 중요한 것이득도라든가열반이라든가부처의경지로가는것이 아닌, 인간 속으로 들어가 슬픔의 그릇인 인간을 위하여 죽을때까지봉사하는것이라는내용을담고있다. 김시습은 도교사상을 바탕으로 장자(莊子)와 노자(老 子)를 연구하면서 인간의 생명을 무리하게 연장하는 것 이 아니라 자기에게 주어진 생명을 이름답게 살아가는 방법이무엇인가를연구했다. 그는그해답이 ‘노동’이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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