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5 법무사 7월호
73 『 법무사 』 2015 년 7 월호 는 것을 깨닫고 일생동안 노동을 하고 살았으며, 내단사 상(內丹思想), 즉 수련을 통해 오래묵은 기(氣)를 내뱉고 신선한 기를 들여 마시는 방법으로 수련했다. 김시습은 우리나라 수련도교의 비조(鼻祖)로서 「산해경」의 기본 정신을완전히이해하며실천한사람이기도하다. 4) 자유인인가, 경계인인가! 김시습은 격식에 얽매이지 않는 자유로운 시를 짓고, 엄격한 시도 자유자재로 지었으며, 단편·장편 가릴 것 없 이 글을 썼다. 그는 20대에서 30대까지 경주 남산 부근 에 살았는데, 그곳에서 바로 『금오신화』를 집필했다고 한다. 금오는경주남산, 그가운데에서도 ‘금오봉’을가리 킨다고하는데, 우리나라전체를가리킨다는말도있다. 우리가 사는 세상에서 완전히 벗어난 사람은 아니지 만 위대한 업적을 남기는 사람들을 ‘방외인(方外人,)’즉 방의 경계에서 들어가지도 나가지도 못하면서 방의 주 변을 맴돌며 이 세상의 비리를 고발하고 정의의 관념으 로 살아가는 ‘경계인(marginal man)’이라고 한다. 바 로 김시습이 그런 경계인의 전형적인 인물이라 하겠다. 김시습은 평생을 경계에 살면서 세상을 비판하고, 인 간이 어떻게 살아가야 하는지를 설파했다. 슬픔의 그 릇인 사람들을 잊고서 나만 혼자 득도할 수는 없다는, 과망(果忘)할 수 없다는 메시지였던 것이다. 5) 원효(元曉)에게서 삶의 길을 발견하다! 김시습은 경주 남산에 머물면서 신라의 승려 ‘원효’의 비를보고, 성(聖)과속(俗)을넘나들며매임이없었던원 효의 삶을 추모했고, 원효에게서 구원을 발견했다. 원효 를 자신의 롤 모델 (role model)로 삼은 이유에 대해 ‘성 과속을넘나드는원효의삶과방대한저술’을들었다. 일각에서는 김시습이 글을 남기려 하지 않았다고 말 하지만, 『매월당집』만 해도 1500수의 시가 들어 있고, 조선전기에 그만큼 많은 시를 남긴 사람도 드물다. 김시 습은 사람들에게 메시지를 남기고 싶어 했다. 하지만 만 일그가원효를발견하지못했다면, 별다른저서없이세 상을 떠돌다 생을 마감했을지도 모를 일이다. 그만큼 원 효가김시습의생애에미친영향이엄청났다는것이다. 6) 절망의 순간에도 남긴 메시지들 말년의 김시습은 58세 되던 1492년부터 충청도 홍 산(鴻山)의 무량사에 있었다. 그는 「무량사와병(無量寺 臥病)」이라는 시에서 당시의 심경을 이렇게 토로했다. 봄비 흩뿌리는 이삼월 선방에서 몸을 일으켜 앉는다. 달마가 서쪽으로 온 까닭을 묻고 싶다만 중들이 부산떨까 두렵구나. 春雨浪浪三二月, 扶持暴病起禪房 向生欲問西來意, 却恐他僧作擧揚 조숙한 천재, 외로운 방랑자, 꿈꾸다 죽은 늙은이…. 세간의 명리(名利)를 벗어나 지팡이 하나, 짚신 한 쌍으 로 무심한 구름과 사심 없는 달빛처럼 자적(自適)하던 사람이 김시습이다. 그로서는 종파적 분별식(分別識)이 그리 문제 되지 않았고, 참된 진리에 도달하는 것이 그의 크나큰 바람 이었다. 그는 시대의 아픔을 자기의 아픔으로 일체화 하여 세상을 슬프게 바라보고 그 슬픔을 어떻게 극복 할 것인가를 고민했다. 우리에게는 지식이 아니라 편안히 잠을 잘 수 있게 만 드는 정신이 중요하다. 바로 그 사실을 일깨워준 사람, 모든 이가 천재라 경탄해마지 않았지만 스스로는 아직 절대진리에 도달하지 못했음을 늘 반성하던 인간적 고 뇌를가진사람, 그것이바로김시습의매력이다. ■ 심경호강의(플라톤아카데미) 동양고전프로그램 ■ 『인문학명강』(21세기북스), p.6~25, 심경호편 p.337~371 ■ 『매월당김시습』(이문구장편소설) ■ 『하룻밤에읽는한국사』(최용범), 페이퍼로드 ■ 고대교우회보등기타 참고문헌 인문학의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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