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5 법무사 9월호
77 『 법무사 』 2015 년 9 월호 한 소설가 이태준은 『한중록』을 보고 “이것이야말로 ‘조선의 산문고전’”이라 말했을 정도로, 『한중록』은 뜨 겁고 유려한 문장으로 독자들을 사로잡는다. 『한중록』은 조선시대 어떤 문학도, 세계문학 어디에 서도 찾아보기 힘든 인간 내면의 깊은 심연을 그린 작 품으로, 역사와 문학을 뛰어넘는 인간의 내면에 대한 기록이기도 하다. 애초 혜경궁은 문학작품으로 생각하고 글을 썼거나 일반 독자를 대상으로 집필한 것이 아니라, 자신의 손 자 ‘순조(純祖)’를 주독자로 선조들의 이야기를 들려준 다는 의도로 『한중록』을 집필했다. 그래서 혜경궁 홍씨와 순조가 다 아는 내용은 생략 되어 독자들이 그 내용을 이해하는 것이 쉽지 않다. 하 지만 최근에는 다양한 사료들이 데이터베이스화되면 서 교차 검토가 가능해져 정확한 해석이 가능하게 되 었다. ▶ 다섯차례에 걸쳐 기록된 집필기 첫 번째 기록 - 정조의 효도를 받으며 자신의 인생 을 세심하게 회고 『한중록』의 중심인물은 사도세자다. 한 번 들으면 결코 잊을 수 없는 엽기적인 사건, 아버지가 아들을 뒤 주에 가두어 8일 동안 굶겨서 죽였다는 것은 가히 충 격적인 사건이 아닐 수 없다. 영조는 한 나라의 최고통 치자로서 자신의 대를 이을 왕자를 왜 죽인 것일까? 혜경궁은 사도세자의 참혹한 죽음 앞에서 숨소리조 차 낼 수 없었다. 시아버지가 남편을 죽였지만 어디 하 소연할 데도 없었고, 그저 자신과 아들을 살려준 것만 으로도 ‘고마워’해야 할 처지였다. 하지만 이 비극은 사 건의 끝이 아니라 시작이었다. 사도세자 사후 온갖 고난을 이겨낸 정조가 드디어 왕위에 오른다. 정조는 그간 자신의 권력승계를 방해 해 왔던 자들을 처단하기 시작하는데, 거기에는 자신 의 외조부 홍봉한, 외삼촌 홍낙임, 외종조부 홍인한 등 이 포함돼 있었다. 혜경궁은 『한중록』에서 자신의 가문과 가족들은 죄 가 없다고 변호했지만, 정조는 단호하게 외가를 숙청한 다. 신고(辛苦)의 세월을 견뎌내고 마침내 아들의 왕위 등극을 보았지만, 자신의 아들이 자신의 친정을 공격 하는 참변을 겪은 것이다. 아들에 의해 친정이 풍비박산 난 후 20년 세월이 흐 르고, 어느새 40대이던 혜경궁도 환갑의 노인이 되었 다. 아들 정조도 40대 중반의 장년으로 능숙하게 조정 을 이끌면서 지난 날 자신의 경솔함을 사과하고 어머 니를 위로하는 자애로운 아들이 되었다. 비록 실행에 옮기지는 못했지만, 이 시기 정조는 1804년 갑자년이 되면 아들 ‘순조’에게 왕위를 물려주 고, 자신은 혜경궁을 모시고 화성으로 가 아버지 사도 세자의 아들 노릇을 제대로 해보겠다는 뜻을 보였다고 한다. 이른 바 정조의 ‘갑자년 구상(甲子年構想)’으로, 혜경궁 홍씨가 아들 잘 둔 보람을 느낄 수 있었던 시기 였다. 바로 이 시기에 혜경궁이 장조카 홍수영의 부탁에 따 라써준글이 『한중록』의첫번째기록이다. 이글은전형 적인 회고록으로, 혜경궁의 탄생 과정, 친정에서의 성장, 궁으로 들어온 일 등 양반명문가의 딸이 세자빈으로 간 택되어세자빈으로살아가는자신의일상을세심하게기 록하고 있다. 이 첫 번째 기록은 당시의 궁중 풍속을 많 이담고있어사료로서의가치도매우높다. 정조의 갑자년 구상도 얼마 전까지는 역사학계에서 잘 받아들여지지 않았으나, 김조순의 『영춘옥음기(迎 春玉音記)』나 정약용의 『여유당전서(與猶堂全書)』 등 다른 사료들에서 갑자년 구상에 대한 기록이 새롭게 확인되고 있는 것을 보면, 당시 풍속이나 국정에 관한 기록을 담고 있는 『한중록』의 사료적 가치가 새삼 중 요하게 여겨진다. 두 번째~다섯번째 기록 - 정 조 사후 끝나지 않은 참화에 대한 자기방어 인문학의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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