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5 법무사 9월호

78 인문학의창 정조는 갑자년 구상으로 부모에 대한 효를 다하려 했 지만, 갑작스런 종기로 인해 급사를 하고 만다. 이에 당 시 11살이던 어린 순조가 왕위에 오르게 되면서 왕실의 최장자 ‘정순황후(貞純王后)’의 수렴청정(垂簾聽政) 시 대가 열린다. 정순왕후의 ‘경주 김 씨’ 가문은 이런 기회 를 놓치지 않고, 자신의 가문과 대립하던 혜경궁의 친정 ‘풍산 홍 씨’ 가문에 대한 정치적 보복에 나섰고, 이 과 정에서혜경궁의동생홍낙임이죽음을맞이한다. 이제는 거의 일흔 살 노인에 가까운 혜경궁 홍씨의 비운이 끝도 없이 다시 시작된 것이다. 이때 혜경궁은 또다시 자신과 친정의 변호를 위해 애끓는 글을 쏟아 낸다. 바로 67세이던 1801년에 쓴 『한중록』의 두 번째 글과 1802년에 연이어 쓴 세 번째 글이다. 그리고 네 번째 회고록은 1805년 정순왕후 사망 후 쓰여졌다. 순조의 생모인 수빈 박 씨는 정순왕후가 사 망하자 자손들이 모두 알 수 있도록 ‘임오화변’의 경과 를 써달라고 혜경궁에게 부탁한 것이다. 마지막으로 1806년인 72세 때, 혜경궁은 정순왕후 집권기에 썼던 세 번째 글에서 시원하게 할 말을 못했다 며수정본인이른바 ‘병인추록(丙寅追錄)’을완성한다. 『한중록』의기록사에서알수있듯이회고록의대부분 은정순왕후집권기, 즉, 혜경궁의친정이다시핍박을받 던시기에쓰여졌다. 따라서친정에대한변호와정적들에 대한증오가주요정서를이룰수밖에없었다. 『한중록』이 ‘증오의서’로불린것도바로그런이유때문이다. ▶ 『한중록』이 말하는 사도세자의 죽음 사도세자는 광기로 죽임을 당했나, 당쟁의 희생양 인가? 사도세자의 죽음에 대한 원인을 둘러싸고 두 가지 설이 있다. 첫째는 사도세자가 미쳤기 때문이라는 ‘광 증설(狂症說)’로 혜경궁 홍씨의 『한중록』에 근거한다. 두 번째는 ‘당쟁 희생설(黨爭 犧牲說)’로, 이는 정조 의 명에 의해 쓰여진 사도세자 죽음에 대한 공식기록 「현릉원행장(顯陵園行狀)」에 근거를 둔다. 현릉원은 수 원 화성(水原 華城)에 있는 사도세자 무덤 이름이다. 영조는 사도세자의 죽음 이후 그에 대해 일체의 말을 못하도록 명령했다. 그에 따라 『한중록』과 『조선왕조실 록』에서도 사도세자가 죽은 해를 ‘아무 해’라는 의미의 모년(某年)이라표현하거나, 뒤주를 ‘일물(一物)’이라고 하 는등그의죽음에대한정확한원인은베일에가려졌다. 대중들이 『한중록』에 대해 알게 된 것도 20세기 중 반에 들어서다. 그 전의 사람들은 사도세자의 죽음에 대해 자세히 알 수가 없었고, 다만 정조가 기록한 『현 릉원행장』을 통해 알 뿐이었다. 하지만 『현릉원행장』 은 왕의 아버지에게 뭔가 결함이 있더라도 사실대로 쓸 수가 없었고, 그렇다고 거짓을 쓸 수도 없었으니 모 호하게 기술될 수밖에 없는 기록이었다. 사도세자는청소년기이후광증이나타났던것으로보 이지만, 정조는 사도세자가 어렸을 때 들은 칭찬을 늘어 놓은다음에죽을무렵에는사도세자의적당(敵黨)을만 들어놓는다. 그적당의대표적인물이홍계희(洪啓禧)와 김상로(金尙魯)로, 이들은멸문의화를당하게된다. 무리하게 어떤 사람을 높이는 논리를 만들다보면 희 생되는 사람이 있기 마련인데 정조는 외가를 슬그머니 반(反) 사도세자파로 몰아간 것이다. 결국 『한중록』은 어머니 혜경궁이 아들 정조의 이러한 논리를 반박하기 위한 글이라고도 할 수 있다. “사도세자는 광기로 인해 아버지를 죽이려 했다” 혜경궁 홍씨는 『한중록』에서 사도세자의 죽음에 대 해 다음과 같은 논리를 펼친다. “사도세자는 어려서 총명했으나 자라면서 아버지의 구박을 받아 미쳤고, 그 결과 발작을 일으키면 아버지 를 죽이려 했는데 이로 인해 반역죄로 몰려서 죽음에 이르렀다.” 사도세자의 광증과 반역죄를 보여주는 사료에는 『한중록』뿐 아니라 『조선왕조실록』 가운데 「영조실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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