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6 법무사 2월호
79 78 법무사 2016년 2월호 문화의 멋 • 공감 인문학 현상학, 20세기 과학에 포섭된 철학을 구하려는 제3의 시도 20세기를 넘어오며 철학은 급속하게 발전한 과학기술 의 도전을 받게 된다. 특히 심리학이 발달하면서 전통적으 로 철학의 영역으로 인정되어오던 인식과 정신현상과 같 은 분야들이 점차로 심리학의 탐구분야로 자리를 옮겨가 게 되었다. 이와 같은 현상에 긴장한 철학계에서는 두 가 지 흐름이 일어나는데 하나는 철학에 과학을 포섭하는 영 미철학적 흐름과 이와는 전혀 반대로 과학과 철학을 별개 의 학문으로 분리하고자 하는 흐름이었다. 그러나 이런 흐름과는 달리 과학의 근간을 이루는 실증 주의를 공격하며, 그것이 과연 참된 의미의 객관이 될 수 있는지를 묻는 철학적 사조가 등장하였는데, 그것이 바로 에드문트 후설(Edmund Husserl, 1859~1938)이 정립한 ‘현상학’이었다. 현상학은 대상을 의식, 또는 사유에 의해 구성하는, 소위 논리적 구성주의 입장에 서지 않고, 오직 직관을 통해서 대 상의 본질을 파악하려는 데 철학의 초점을 맞춘다. 이는 존 재하는 사실, 곧 대상에 철저를 기하여 현상 그대로를 기 술하려는 것인데, 이런 의미에서 경험주의와 일맥상통한다. 그러나 경험주의는 주어진 사실과 그 사실의 본질을 혼 동하고 있는 데 반해 현상학은 사실에 대한 직관을 통해서 사실의 본질을 파악하려는 것이다. 그런데 사실의 본질을 파악하기 위해서는 사실에 대한 판단을 중지(epoche)해야 한다. 즉, 그 사실에 괄호를 치고 그에 무관심하면서 본질 을 직관하려는 현상학적 태도를 취해야 한다는 것이다. 현상학을 정립한 후설의 생애와 사상을 통해 현상학이 파악하는 세계와 인간에 대한 이해를 알아본다. 후설의 생애, 현상학을 정초하다 후설은 1859년 4월 8일, 당시 오스트리아 메렌 주의 프 로스니츠(현재의 체코)에서 유대인의 아들로 태어났다. 고 향에서 초·중등학교를 마치고, 1876년(17세)에 라이프치 히 대학에 입학한 후설은 처음에는 천문학에 관심을 가졌 으나, 수학을 배우고 난 뒤 수학으로 관심이 기운다. 24세이던 1883년, 빈 대학에서 박사학위를 받고, 연구 를 계속하였는데 그때 훗날 대통령이 된 친구 마사리크의 권유로 브렌타노의 철학 강의를 듣고 감동을 받아 수학에 전념하던 뜻을 접고 철학으로 전향하게 된다. 이후 후설은 브렌타노의 자택을 자주 방문해 철학을 배 우며 서신 질의도 자주 했는데, 처음에는 단순한 호기심 으로 브렌타노의 강의를 들었지만 어느새 그의 인격에 매 료되었다고 회고한 바 있다. 브렌타노가 없었다면 철학을 몰랐을 것이라고 했을 정도로 그의 철학에 푹 빠진 후설이 었으니 이후 브렌타노가 후설 철학의 초석이 된 것은 당연 한 것이었다. 1886년, 27세가 된 후설은 할레대학에서 교수자격 논 문 「수의 개념에 대하여」를 제출, 강사가 되었고, 이때 유대 교에서 신교로 개종하며 결혼식도 올린다. 32세였던 1891 년에는 『산술의 철학』을 출판, 잊지 않고 “나의 스승 브렌 타노에게 감사의 마음을 담아서”라는 헌사를 써서 브렌타 노에게 증정하였다. 이후 그는 집필에 전념해 1900년(41세)에 『논리연구』 제 1권을, 1901년에 제2권을 잇달아 발간하면서 학계의 주 목과 비판을 동시에 받았다. 1902년에는 조교수, 마침내 1906년에 괴팅겐 대학의 정교수로 임용된다. 52세가 되던 1911년, 후설은 잡지 『로고스』에 「엄밀학으 로서의 철학」을 기고하며 당시의 실증주의·자연주의 철 학과 역사주의 철학을 비판하였고, 1912년에는 그의 주저 『순수현상학과 현상적 철학의 이념들』을 간행하면서 철학 계에서 확고한 자기 기반을 구축하게 된다. 이로 인해 괴팅 겐 대학에는 그 강의를 듣고자 하는 학생과 학자들의 인파 가 형성되었고, 한편에서 현상학 관련 기관지도 발행되면 서 소위 ‘현상학파’라는 하나의 철학적 조류가 형성된다. 이후 후설은 프라이부르크 대학으로 전임해 1928년까 지 약 12년 동안 재직했는데, 이때 가르친 하이데거가 훗 날 후설의 강좌를 물려받게 된다. 이후 교수를 은퇴한 그 는 연구를 계속하며 많은 저술을 남겼고, 1929년(70세) 에는 소르본 대학에 초빙되어 ‘선험적 현상학 입문’이라는 제목으로 4회에 걸쳐 강연하기도 했다. 이때의 강연집이 1931년, 『데카르트적 성찰』이란 이름으로 출간되었다. 1933년(74세)에는 히틀러가 집권해 유대인을 박해하는 한편, 나치판 분서갱유를 저질렀다. 마침 미국의 남캘리포 니아 대학에서 철학 강의를 맡아 달라는 요청과 함께 이미 망명해 키일 대학교 법대학장으로 있던 그의 아들이 망명 을 권유했지만, 그는 정들었던 프라이부르크를 떠나지 않 고 연구에만 전념한다. 1935년(76세) 5월에 빈문화연맹의 초청으로 ‘유럽 인간 성의 위기에 있어서의 철학’이란 제목으로 강연하였고, 그 해 11월에는 프라하철학회의 요청으로 ‘유럽학문의 위기 와 심리학’이란 제목으로 강연하였다. 당시의 강연들을 정 리해 그의 사후에 『유럽학문의 위기와 선험적 현상학』이란 저서가 간행된다. 1938년 4월 27일, 향년 79세의 나이로 후설은 프라이 부르크의 자택에서 늑막염을 앓다 사망한다. 당시 5만 여 장에 달하던 그 유고는 벨기에 루뱅 대학으로 옮겨져 ‘후 설문고’로 출판된다. 후설이 정립한 현상학은 독일의 셸러 와 하이데거, 프랑스의 사르트르와 메를로퐁티 등의 많은 철학자에게 지대한 영향을 미쳤으며, 훗날 인문사회학에 미친 영향도 지대하다. 후설의 사상, 사물의 본질을 어떻게 파악할 수 있는가? 현상학의 대상 - 현상 또는 사상 ‘현상학(phanomenologie)’이란 용어는 후설 이전부터 사용되었는데, 일반적으로 사물의 ‘나타남’을 기술하는 학 문이었다. 그러나 후설의 ‘현상학’은 사물의 본질을 직관할 수 있는 태도를 문제시한다. 후설은 현상학의 대상을 ‘현상(phanomen)’ 또는 ‘사상 (事象, Sache)’이라 하였다. 사상이란 경험적 사실 즉, 어떠 후설 (Husserl) 의 현상학, 진리는 생활세계에 있다! 최진태 법무사(대구경북회)·법학박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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