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6 법무사 6월호

79 법무사 2016년 6월호 로 사용하였다. 반면, 윌리엄 제임스(W.James, 1842~1910)는 관념의 진위(眞僞)는 그 자체로서는 결정되지 않으며 다만 그것이 사실에 부합하는가 아닌가, 그리고 그 결과가 유용한가 아 닌가를 보아서 그것의 진위를 결정해야 한다고 하였다. 그 러므로 시간과 공간을 초월한 절대적 진리는 부정된다. 존 듀이(J. Dewey, 1859~1952)는 그 행동적 요소를 더욱 강조하였다. 우리의 모든 관념이나 사상은 우리의 현 실생활에서 일어나는 문제해결을 위한 도구에 지나지 않 는다는 것이다. 따라서 그의 철학을 도구주의, 또는 실험 주의라 한다. 인간은 생물의 일종이기 때문에 환경과의 상호작용을 하며 우리의 경험이 환경에 적응하지 못할 때 그것을 타개 하기 위한 기능이 ‘사고작용’이라는 것이다. 그리고 생존에 필요한 한 가지 기능으로서 장래를 예상할 수 있는 지성을 특히 ‘창조적 지성’이라 하였으며, 그것은 결국 인간이 장래 에 더 잘 살기 위한 불가결한 도구이며 방법으로 보았다. 이러한 실용주의 철학은 미국의 전통적 철학이 되어 미 국의 정치, 경제, 사회, 문화 전반에 많은 영향을 미쳤으며, 미국의 성장과 함께 세계 각국으로 일파만파(一波萬波)로 전파되어 현대철학에 있어 하나의 주류사상을 형성하기에 이르렀다. 실용주의 창시자, 퍼스 의 생애와 철학 생애 퍼스는 1839년 9월 10 일, 미국 매사추세츠 주의 케임브리지에서 하버드대학의 수학교수 벤자민 퍼스의 차 남으로 태어났다. 당시 미국에서 가장 권위 있는 수학자이 자 영문학자였던 부친 덕분에 퍼스는 어렸을 때부터 롱펠 로, 에머슨 등의 저명한 시인과 학자들을 보면서 학구적인 분위기 속에서 성장했다. 퍼스는 일찍부터 화학을 공부하기 시작해 8세 때에 는 자신의 실험실을 가지고 화학공부를 하면서 12세 때 ‘화학사’를 쓰는 등 과학자로서의 재능을 보였다. 하지만 1851년(12세)에 케임브리지중학교에 입학하면서부터는 돈을 헤프게 쓰며, 불량한 학생들과 어울려 다녀 정학처 분을 받는 등 사춘기의 방황도 했다. 중학교 졸업 후에는 다시 공부에 전념해 딕스웰학원에 들어갔고, 1855년 하버드대학에 입학했다. 퍼스는 14세 때부터 논리학 서적들을 읽었고 대학에 들어가서도 정규 과목보다는 논리학과 철학 강의를 열심히 들었다. 얼마 후 칸트에게 관심을 가지게 된 그는 이후 3년간 매일 2시간 씩 『순수이성비판』을 읽으면서 거의 암기할 정도가 되었다 고 한다. 1862년(23세), 하버드에서 화학석사 학위를 받은 이후 그는 화학보다 독일철학에 열중했으나, 석사를 졸업한 후 부터는 미국해안역학측량소에 취직해 약 30년간 이와 직 간접으로 관계를 맺고 각지를 떠돌아다니며 측량사업에 종사했다. 1862년에 결혼했으나 불행의 연속이었다. 1876 년에 부인이 가출하면서 1883년 이혼하고 1년 후 프랑스 계 여성과 재혼했는데, 그녀는 그를 극진히 내조했다고 한 다. 1869년(30세)부터 1875년까지 퍼스는 하버드대학 부 속전문대의 조수로 일하면서 ‘영국 논리학자들’이란 제목 으로 9회에 걸쳐 강연을 했다. 이를 계기로 1870년 형이 상학클럽의 철학연구모임에 참가하였고, 여기에서 제임스 등과 만나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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